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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yoo
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19)-잔 애덤스(2)
donyoo

 

미 초대 부통령(1789-1797)

1789년 2월4일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선거에서 각주를 대표하는 69명 선거인단의 69표를 얻은 조오지 워싱턴은 초대 대통령에, 34표를 얻은 애덤 스미스는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선거인단은 2개의 투표권으로 2명의 후보자를 선출할 수 있었다. 득표 순서대로 대통령과 부통령이 선출되었다.

부통령에 선출된 애덤스는 상원의장직을 겸임했다. 워싱턴의 재선에 따라 애덤스는 8년간 부통령직을 재임하며 워싱턴의 지시 하에 해밀턴이 주도하는 미 행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며 해밀턴과 연방당을 만들었다.

한때 애덤스는 민주공화당을 세운 제퍼슨의 의견을 따라 해밀턴의 연방은행 정책을 비난했다가 해밀턴의 적이 되었다.

 

미2대 대통령(1797-1801)

1796년 12월 7일 거행된 미 합중국2대 대통령선거에 각주를 대표하는 138명의 선거인단은 276개의 투표행사를 통해 애덤스는 71표를 얻어 대통령에, 제퍼슨은 68표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애덤스는 해밀턴을 중심으로 움직여지는 워싱턴의 내각을 개편하지 않고 1797년 3월4일 취임식을 거행했다. 임기가 시작되면서 미국은 프랑스와 영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정치적 외교에 휘말리게 되었다. 문제는 1795년 영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맺은 제이 조약을 트집잡고 미국의 상선을 공격하는 프랑스와의 외교정책 실패였다.

제퍼슨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한 프랑스의 내정간섭에 대한 보복으로 애덤스는 미 상하원에서 미국은 프랑스와 전쟁준비를 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편으로 4인방의 프랑스사절단을 프랑스에 보냈으나 프랑스가 그들의 화친조약을 받아줄리가 없었다. 이로 인해 애덤스는 1798년부터 1800년까지 해군력을 증강시키고 프랑스군이 본토를 침략한다는 가상 하에 프랑스와 선전포고 없이 가상전쟁에 들어갔다.

총사령관은 은퇴중인 워싱턴에게 위임하고 해밀턴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또한 이민법을 강화하여 프랑스인들의 입국불허와 스파이 추방정책을 고수하고 이러한 정책을 비판하는 표현의 자유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 민주공화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빗발치는 반대여론을 일으켰다.

1798년 이집트 나일강전투에서 영연합국에게 패한 프랑스는 1800년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어 프랑스와 가상전쟁은 끝을 맺게 되었다. 후에 애덤스는 세계를 주름잡는 미 해군의 아버지로 알려졌다. 막대한 전쟁준비로 인한 국채탕감을 위해 최고 1%의 재산세를 국민에게 부과하여 1789년 잔 프라이스는 재산세반대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해밀턴이 이끄는 군대로 무혈제압 되었고 주모자들은 반역죄로 교수형의 판결을 받았으나 애덤스의 사면으로 풀려났다. 1800년 11월1일 애덤스는 워싱턴DC에 소재한 현재 백악관으로 알려진 대통령관저의 첫 주인이 되었다.

1800년 12월 3일 대통령선거 재선에 도전한 애덤스는 낙선되었다. 연방당 분열로 표가 나누어지고 프랑스와의 외교정책실패와 표현의 자유 제한 그리고 가상전쟁으로 인한 경제침체가 낙선의 요인들이었다.

 

은퇴생활(1801-1826)

낙선의 패배감을 가슴에 간직한 66세의 애덤스는 제퍼슨 미3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가하지 않고 보스턴 남쪽외곽 피스필드 농장으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였다.

항상 검소한 생활로 $13,000의 거액을 저축한 애덤스는 농장을 매입하여 사망시 $10만 달러의 유산을 남길 수 있는 갑부가 되었다. 평생 중요한 결정에 애덤스를 도와준 부인 애비게일과 애덤스는 비싼 임금을 주고 백인노동자들을 고용했다.

그들은 흑인 노예해방운동 선구자로 역사에 알려져 있다. 은퇴 후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제퍼슨의 루이지애나 영토구입에는 아들 잔 쿠윈시와 함께 크게 찬성했다.

1812년부터 은퇴한 정적 제퍼슨과 화해를 하고 사망시까지 편지왕래로 절친한 친분을 맺었다. 부인은 1825년 거행된 아들 잔 쿠윈시의 제6대 미 대통령 취임식을 보지 못하고 1818년 장질부사로 세상을 떠났다.

애덤스는 1825년2월 아들의 6대 대통령 당선에 큰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미 독립선언 50주년 되는 1826년 7월 16일 저녁6시 30분에 90세의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메사추세츠 쿠윈시에 자리잡은 부인의 묘소 곁에 안장되었다.

사망전 제퍼슨의 안부를 전해 받은 애덤스는 같은 날 몇 시간 전에 독립선언서를 같이 작성한 제퍼슨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국부들의 독립기념일 사망은 우연의 일치라기보다 그들에 의한 애국심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사망 한달전 애덤스는 ”독립 후 미국의 역사는 대통령의 직권선용과 남용에 좌우된다”고 유언을 남겼다. 그 후190년 만에 미국은 미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직권남용 자 트럼프를 맞아 국내분열과 외톨이 외교정책으로 세계자유경제국가를 이끌어가는 미국의 정경 체제가 잠시 몸살을 앓게 되었다.

미 국민들은 바이든을 비롯하여 건국국부들의 정신유산을 이어받는 차기 대통령들의 국내외 단합정책을 따를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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