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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들어 제일 추운 날, 어젯밤에 난방기가 고장이 났다. 어찌나 추운지 온몸은 잔뜩 웅크려 들고 두 주먹은 꽉 쥔 채 사시나무처럼 마구 떨었다. 수리를 마친 집안이 따뜻해지려면 몇 시간은 더 있어야 될 모양이다. 창가에 앉으니 나른한 상념이 몰려왔다. 집안에서 이 지경인데 홈리스들은 얼마나 추울까. 문득 그가 떠올랐다.

나이아가라 지역 문우들 몇이 매주 수요일 버거킹 햄버거 집에 모여 만남을 즐기던 때였다. 주인 ‘한’사장이 무한정 채워주는 커피에 두세 시간 한담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

우리의 지정석은 식당 끝 모퉁이에 둥글게 의자를 배치한 특별석이고 그는 늘 두 테이블 앞 창가에 자리잡고 앉았다. 한창 대화에 몰두하다가도 일제히 시선이 쏠릴 만치 그가 들어오는 방식은 특별났다.

타고 온 자전거를 바로 창가에 주차한 후 카키색 배낭을 메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들어섰다. 걸음걸이는 마치 박자에 맞추거나 걸음 수를 세면서 걷는 듯 군대식 구보로 뚜벅뚜벅 걸어와서 두발을 탁탁 한데 모으며 테이블 곁에 일단 멈추었다. 숱이 많지 않은 곱슬머리가 이마에 드리워지고 외양은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배낭의 왼쪽 옆에 캐나다 깃발을 달고 다니는 것이었다.

더욱 기이한 것은 의자 위에 배낭을 벗어놓은 후 남쪽을 향하여 차렷 자세로 힘차게 거수경례를 한 다음 다시 동쪽을 향하여 경례를 부치는 것이었다. 전시훈령을 받들거나 임전태세의 결의가 깃든 엄숙한 자세였다.

일련의 의식을 마치고 나면 카운터에 가서 주문을 하였다. 어디를 향하여 경례를 부치는지, 경례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홈리스(노숙자)라는 추측 외에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그를 ‘미스터 애국자’라고 불렀다.

추운 겨울 홈리스 애국자를 떠 올리니 오래전 여행 필름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S박사의 인솔로 중국 연변 조선족자치주 용정과 고구려유적 답사여행이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고주몽의 군사훈련장, 고구려건국비사 광개토대왕비를 보았다.

거대한 산 같은 장수왕 능과 그만큼 거대한 300여 개의 왕과 귀족, 장수의 도굴되고 허물어진 능 터, 용의 눈이나 발톱에 박은 보석들은 다 뽑아간 고구려 고총 고분벽화, 어린이 놀이터로 뭉개버린 국내성 성터, 가는 곳마다 고구려 문화말살정책이 뒹굴고 있는 폐허가 울분을 자아냈다.

그러나 더욱 심금을 찌른 것은 거의 평평해진 돌무덤이 길가에 수없이 널려있는 것이었다. 안내자의 설명으로는 그게 모두 이름 없는 독립지사들의 무덤이라고 하였다. 현재 연변 자치주에 거주하는 한족 중의 거의 전부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라고 하여도 틀림이 없다는 것이었다.

만 갈래의 물이 모여든다는 뜻의 도문강(두만강)과 구부러진 노송 하나 외로운 일송정, 물 건너 북한 땅을 바라보니 애국자들의 처절한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였다.

 팬데믹 제재가 시행되기 얼마 전 우연히 그 햄버거 집에서 미스터 애국자를 만났다. 그런데 자전거 없이 걸어서 들어오는 것이었다. 자신이 처분했는지 도난을 당했는지 자전거 없는 그가 측은해 보였다. 여전히 남쪽, 동쪽을 향하여 거수경례를 부쳤지만 조금 피곤한 모습이었다.

마침 손님도 많지 않아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햄버거는 내가 지불해도 괜찮을까요?’ ‘아니요. 저도 있어요.’ 아주 정중하게 사양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표정 밑에 깊이 새겨진 자존심을 보았다.

팬데믹으로 인해 모임이 제약되고 공공기관이 문을 닫게 되면서 나이아가라폭포 주변을 드라이브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무심히 지나치던 것들을 더 자세히 볼 수 있고 늘 시간에 쫓기 듯 서둘던 생각의 틀에 조금은 천천히 걷는 속도조절이 이루어지는 듯하였다.

버거킹 햄버거 앞길 룬디스레인(Lundy's Lane)을 남으로 조금 내려가면 커다란 아치형 철제조형물이 걸려 있다. 1814년 미영전쟁의 상징으로 시에서 만들어 놓은 기념물이다. 조형물이 설치된 언덕 위의 건물 앞에 붙은 팻말을 읽어보니 룬디스레인 전쟁기념관이라고 쓰여 있었다.

집에 돌아와 웹 서치를 해보다 깜짝 놀랐다. ‘미스터 애국자’가 경례를 부친 남쪽은 룬디스 장군의 이름을 딴 전쟁기념관과 그 위 철제 조형물의 싸우는 병사들이고 동쪽은 한 블록을 전부 차지한 드라몬드 전몰용사묘지였다.  

나이아가라 온 더 레이크의 ‘포트조오지’(Port George)를 시작으로 ‘퀸스턴하이츠 (Queenston Heights)’(브록장군 동상과 캐나다 역사박물관), ‘룬디스’, ‘치파와’, ‘포트 이리’까지 나이아가라 강 유역은 미국과 영국(캐나다) 사이에 1812년부터 1815년까지 3년간의 격전지였다.

수륙만리 캐나다에 살고 있는 이민자에게 애국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본다. 자신의 형편을 구차하게 여기지 않고 존재의식과 자존심을 지키면서 오로지 한국인, 캐나다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 나라있는 백성으로 만들어 준 병사들과 선열들께 늘 감사하는 마음과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자주와 독립은 결코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변 벌판 이름 없는 독립투사들의 무덤에 따뜻한 바람만 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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