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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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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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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6
세상을 떠난 ‘칸초네의 여왕’ 밀바

 

이민을 오기 전, 유럽 국가들은 왠지 부유하고 문화적으로 풍요로울 거라고 느꼈다. 그 생각은 여기에 살며 조금씩 바뀌어, “국가마다 아이덴티티가 있고 그 차이가 또 다른 ‘급’을 만드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곳 캐나다도 다양한 이민자들이 있지만 여전히 주도권은 유럽 출신 백인, 그 중에서도 먼저 정착한 프랑스와 영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어서 이탈리아계도 아직 주류는 아니지만, 거기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중이다.

 이탈리아 하면 얼른 생각나는 것이 영화 <대부>다. <대부>는 마피아의 범죄를 잔인하게 비추지만, 그들의 가정적인 모습도 엿볼 수 있다. ‘대부’는 마피아 조직원에게는 ‘절대 군주’이어도 가족들에게는 그저 자상한 아버지일 뿐이다. 이 때문에 마피아의 조직범죄를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평도 있지만, 어쨌든 이탈리안의 한 이미지로 자리 잡는다.

영화에서는 마피아가 같은 민족을 도와주는 장면이 가끔 나오는데, 특히 ‘마이웨이(My Way)’를 부른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뒤를 봐주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어찌 보면 시나트라의 삶도 <마이웨이> 노래 가사처럼 ‘모든 길을 다 가봤고’ 많은 것을 겪는다. 그의 명성 뒤에는 마피아 폭력이 따라다녔다.

이탈리아는 음악의 나라이기도 하다. 이탈리안 만큼 소리 높여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경음악 분야에서는 기악보다 노래가 발달되었다. 경음악으로 된 노래를 보통 칸초네라 부르는데, 대중가요인 칸초네(Canzone)는 한국인들도 좋아하는 장르이다. 밝고 서정적이어서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다. 선율 구성도 우리 가요와 비슷해 친밀하다.

칸초네의 대표적인 노래가 ‘오! 솔레미오(O sole mio)’다.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를 태양에 비유한 멋진 곡이다. 그리고 아마 한번쯤 불러 보았을 ‘산타루치아(Santa Lucia)’도 칸초네인데, 어부들이 일을 하거나 축제 때 부르는 노래다.

내가 1988년, 업무 차 이탈리아에 갔을 때 가이드가 들려준 이야기다. “한국에서 성악 공부를 하러 온 유학생이 모텔에서 첫날밤 새벽에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어디선가 ‘산타루치아’ 노래 소리가 들려 창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청소부 아저씨만 있었다. ‘누가 아침부터 발성 연습을 하나’하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청소부 밖에 안 보였다. 그런데 잠시 뒤, 그가 빗자루를 쓸며 “산타~루치아!”하며 노래를 부르는데 성악 공부를 하러 온 자기보다 훨씬 잘 부르는 것이다. 너무나 기가 죽은 그는 성악 대신 패션 공부를 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우스개 소리지만, 그만큼 칸초네가 대중화되어 있고 누구나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칸초네 하면 떠오르는 것이 <산레모 가요제(Festival della Cazone Italiana)>다.

산레모(Sanremo)는 프랑스 국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이탈리아 북서부의 관광도시다. 프랑스 <칸(Cannes)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니스(Nice)와도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5년이 지나도록 관광업이 회복되지 않자 산레모의 똑똑한 지도층들이 매년 1월 말에서 2월 초에 사흘 동안, 가요제를 열기로 한다.

1951년 막을 올린 가요제는 처음에는 라디오로 이탈리아에만 중계됐으나, 1955년 TV 중계가 시작되고 마지막 날 결선이 인접한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에까지 생방송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 말에는 우리나라에도 <산레모 가요제> 입상곡이 수입되기 시작했다. 많은 가수들이 원곡 또는 번안곡으로 그 노래들을 불렀다. ‘카사 비안카(Casa Bianca/언덕 위의 하얀 집)’를 비롯해 ‘논 호 레타(Non ho l' eta/나이도 어린데)’, ‘쿠안도 쿠안도 쿠안도(Quando, quando, quando/언제 언제 언제인지)’, ‘케 세라(Que sera/누구일까)’ 등을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따라 불렀다.

한국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되어 불린 펄시스터즈의 ‘하얀 집’이나 조용필의 ‘케 세라’, 이용복의 ‘어머니 왜 나를 나셨나요’ 등을 당시 음악 프로그램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산레모 가요제>하면 생각나는 가수가 2주 전에 세상을 떠난 밀바(Milva)다. 여든한 살, 스무 살에 가수의 길로 들어서 61년 동안 가수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칸초네의 여왕이다. 밀바는 1959년 이탈리아 국영방송이 주최한 <신인 발굴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차지한다. 무려 7천6백 명 가운데 1위였다.

밀바의 전설이 시작된다. 1961년 <산레모 가요제>에 출전해 ‘서랍 속의 바다’란 노래로 3위에 입상한다. 그 해 비평가들은 그녀를 ‘올해의 가수’로 선정하면서 칸초네 스타의 탄생을 축하했다. 이후 밀바는 아홉 차례나 <산레모 가요제>에 출전해 ‘칸초네의 여왕’이란 이름까지 얻게 된다.

1966년 <산레모 가요제>에 출전해 입상한 ‘네수노 디 보이(Nessuno di Voi/당신들 누구 하나)’는 한국에서는 ‘서글픈 사랑’이란 노래로 알려진다. 이즈음에 부른 ‘아리아 디 페스타(Aria di Festa/축제의 노래)’도 한국에 널리 알려진 노래다. 윤형주, 송창식으로 구성된 트윈폴리오가 ‘축제의 밤’이란 번안가요로 널리 유행시켰다.

‘리멘시타(L’immensita)’는 다른 가수가 불러 산레모에서 입상한 노래지만, 밀바가 커버한 곡이 더 유명해지면서 그녀의 노래가 됐다. 이 노래도 이미배가 ‘눈물 속에 핀 꽃’이란 번안가요로 불렀다.

 

 

 

밀바는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등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 영화음악의 거장인 엔리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 프란시스 레이(Francis Lai) 등과 협업해 앨범을 내기도 했다. 1977년에는 <뮤지컬 에비타>에 삽입된 엔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의 ‘Don’t Cry for me Argentina’의 이탈리아 버전을 내놓는다. 마돈나의 노래가 나오기 20년 전이다.

밀바는 탱고의 대표곡 ‘라 쿰파르시타(La Cumparsita)’를 자주 불렀다. 1916년 우루과이 로드리게스가 만든 곡이지만 세계로 널리 퍼져 많은 영화의 ‘가장행렬’이나 ‘축제’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쓰이고 있는 레전드 노래다.

그녀는 한국을 비교적 자주 찾았던 지한파 가수이기도 하다. 1972년,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할 때 앙코르로 한국 가곡 ‘보리밭’을 우리말로 불러 환호를 받았다. 이후 여러 차례 한국을 다녀갔다.

‘칸초네의 여왕’ 밀바는 아날로그 세대에게 이탈리아의 이미지로 오래 동안 기억될 것이다. 그녀가 떠난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어쿠스틱한 연주에 녹여진 그녀의 노래는 언제나 다시 꺼내 들을 수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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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hyunsoo
황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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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9
"부활"을 본 ‘화(花)요일 아침’에…

 

 8년 전, 한국에 있는 여동생이 토론토로 오는 딸아이 편에 보내준 홍문택 신부가 지은 <오늘은 잔칫날이었습니다>라는 책을 지난해 책장에서 끄집어내어 컴퓨터 옆에 챙겨 놓았다. 그리고 또 몇 달을 묵혔다. 책이라고 하지만 시와 그림으로 구성되어 부지런만 떨면 몇 시간 만에 다 읽을 수 있는데 말이다.

 오늘 아침, 이태석 신부의 다큐영화 <부활>의 서머리(Summary) 편을 보았다. 서머리는 콘텐츠 중 핵심장면만 뽑아 정리한 것이다.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의료 봉사를 하던 신부가 48세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10년 뒤, 어린 제자들이 성장하며 벌어진 기적을 감동적으로 조명한 다큐다. 이 영화를 만든 구수환 감독은 KBS의 <울지마 톤즈>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이태석 신부의 삶을 세상에 알린다. 그후 이태석 신부의 형인 이태영 신부와 함께 ‘이태석 재단’을 운영하였는데, 그 형마저도 2019년에 선종한다. 그가 죽기 전 “이태석 신부 선종 10주기에 영화를 만들어 달라”고 유언을 하는데 “그러겠습니다”라고 약속하게 된다.

 감독은 어떻게 영화를 만들까 고민하던 차에 남수단의 어린 제자들이 생각났다. 제자들을 수소문했더니 놀랍게도 이태석 신부처럼 의사가 됐거나 의대에 다니는 제자들이 57명이나 달했다. 남수단의 작은 ‘톤즈’ 마을에서 국립대 의대생 57명이 나온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공무원, 대통령 경호원, 언론인까지 모두 70명의 제자를 찾을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아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 의사가 된 것이 아니라 신부님 때문에 의사가 됐기에 신부님처럼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태석 신부처럼 한센인 마을에 가서 봉사진료를 하는데, 의사가 없는 주변 마을에서도 소식을 듣고 환자들이 찾아온다. 어느 환자는 “12년 만에 진료를 받았다”고 한다. 제자들은 “신부님이 옆에 계신 것 같습니다. 신부님 일을 우리가 대신해서 너무 기쁩니다”라고 말한다. 이태석 신부의 사랑이 ‘부활’한 것이다.

 감독은 전편인 <울지마 톤즈>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이번 <부활>를 만들며 ‘아이들이 결국 이태석 신부 같은 삶을 사는 모습에 감격했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남수단 제자들이 ‘고향의 봄’을 연주하는 장면, 제자들이 한센인 마을에서 진료하는 모습, 제자들이 이태석 신부의 묘지 앞에 의사자격증과 대학졸업장을 올려놓고 통곡하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부활>을 본 후, 몇 해를 묵혔던 홍문택 신부의 책을 펼쳤다. 책에는 그의 약력이 나와 있다. 홍신부는 1954년 부산 출생으로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1982년에 사제품을 받고 길음동, 명동, 미아동, 고덕동 성당을 거쳐 가톨릭 평화방송 상무, 가톨릭출판사 사장을 역임했다. 그후 두 군데 본당주임을 지낸 후 2011년에 경기도 연천군에 저소득층 청소년들을 위한 <화요일 아침 예술학교>를 설립한다.

 홍문택 신부는 우리 부부의 혼인미사를 집전해 주었다. 그는 주례사에서 “여기 신부가 둘 있습니다. 한 사람은 곧 신랑의 아내가 될 신부이고, 또다른 이는 앞으로 계속 혼자 살아가야 할 신부입니다.” 하며 우스개 소리를 해서 다소 엄숙한 결혼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홍신부가 주례를 맡게 된 것은 아내가 명동성당에서 교리 공부할 때 담당선생이었는데 마침 우리가 그곳에서 결혼을 하게 되어 주례를 부탁했는데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그후 아내와는 계속해서 안부를 주고받았고, 나도 언론을 통해 나름 동정을 꿰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 가족이 이민을 오면서 서로 연락이 끊겼다. 이력에서 보듯이 그는 정말 가톨릭교회에서는 ‘잘 나가는 스타신부’였는데, 엉뚱하게 사재를 털어 <화요일 아침 예술학교>를 설립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화요일 아침 예술학교>는 가난때문에 미술가를 향한 꿈을 접어야 하는 여자고등학생들을 위해 만든 미술전문 대안학교다. ‘예술학교’ 앞에 ‘화요일 아침’이라고 붙인 뜻은 종교를 갖지 않은 아이들에게도 문을 개방해주기 위해서고 또 하나는 ‘하늘에 나는 새도 먹을 것을 주시고 들에 핀 꽃도 예쁘게 피는데 왜 하물며 인간이 걱정이 많냐, 걱정은 오늘로 족하니 너희는 이로운 일을 하라’라는 뜻으로 학교 이름을 꽃 화(花) 자를 붙였다고 한다.

 

 

 한 학년에 정원이 13명, 고등학교 전교생이 39명이고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모든 비용이 무료다. 학생수에 비해 선생은 30여 명이 되어 어떤 해에는 학생보다 선생이 많을 때도 있다고 한다. 학교가 설립되고 3년 뒤, 고3 전원이 대학을 입학해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홍신부는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는 대개 미술을 하면 대학진학을 위해서 전문 과목을 공부하는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예를 들어서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가 반찬을 차리고 음식을 차리고 상을 차렸을 때도 ‘아, 예쁘구나’ 하면서 올릴 수 있다면 재료나 그릇이 훌륭한 게 아니더라도 예쁜 게 아니겠어요? <중략> 노을이 있어도 똑같은 노을이 한 번도 없잖아요. 하늘에 쳐져 있는 노을의 붉은색이나 파장, 그런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것을 자기 삶에서 행복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미술교육이 아닌가? 예능교육이 아닌가? 저희는 꼭 미대를 진학하는 교육보다도 내가 3년 동안 여기서 살면서 내 인생을 어떻게 예쁘게 디자인할 수 있지?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저희 학교의 가장 주된 목표라고 생각됩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한국에 가게 되면 꼭 한번 찾아봐야지’ 했는데, 홍신부는 그렇게 온몸을 바쳐 대안학교의 꿈을 펼쳐 나가다가 2017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 학교는 가톨릭재단의 도움없이 순수하게 회원들의 후원금으로 운영한다. 학교 설립 3년 만에 9천1백 명의 후원 회원이 모였다가 홍신부가 떠나고 나서 지금은 6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후배 신부들이 돌아가며 운영을 하는데 학교 위치가 워낙 먼, 경기도 연천의 산꼭대기라서 재능기부를 하던 선생들도 초창기에 비해 많이 줄었다고 한다.

 홍문택 신부는 어렸을 때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가난했기에 미대를 가지 못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가난때문에 미술에 대한 꿈을 포기한 이들을 위한 대안학교를 만들려고 준비해온 것이다. 어머니가 물려준 집과 자신의 30여 권 책에서 나오는 인세를 투자해 학교부지를 구입한다.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지인들을 찾아가고 전국으로 강론을 다니던 중, 어느 통 큰 후원자의 도움을 받는다. 산골짜기에 학교를 지을 때의 고충은 안봐도 그림이고 그것이 죽음의 배후일 거라는 짐작이 든다. 그래도 그는 학생들에게 “어떤 역경이나 어려움 속에서도 꿈을 버리지 않으면 부활할 수 있다”며 항상 긍정적인 삶을 살라고 지도했다고 한다.

 마침 이 글을 쓰는 4월 27일이 홍문택 신부의 기일이고 화요일이다. “신부님! 아마 10여년 뒤면 훌륭한 제자들이 학교로 돌아와 당신의 꿈을 이을 것이니, 염려는 잊으시고 천상에서 부디 영면하시기 바랍니다.” <부활>을 본 ‘화요일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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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2
캐네디언이 만든 ‘바스켓볼(Basketball)’

 

 요즘 TV를 보면 스포츠 스타들이 많이 출연한다. 이들을 ‘스포테이너’라 부르는데 스포츠(Sports)와 엔터테이너(Entertainer)의 합성어로 쉽게 말해 재능과 끼가 있는 스포츠 선수 출신의 방송인을 말한다. TV 예능 프로그램에 스포츠 스타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이들이 글자 그대로 스타이기 때문이다. 스타도 그냥 스타가 아닌 국민 영웅이다. 중년 이상의 시청자는 요즘 나오는 탤런트나 가수, 개그맨은 잘 모르지만 스포츠 스타는 나이에 상관없이 대부분 다 안다.

 각 분야에서 정상에 오른 스포츠 스타들은 대개 감동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서 진정성이 우러나는 투박하고 인간적인 모습이 호감을 준다. 더불어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를 많이 해봐서 적극성과 ‘끼’까지 지니고 있다.

 나는 일요일이면 왕년의 스포츠 스타들이 모여 농구하는 JTBC의 <뭉쳐야 쏜다>라는 프로그램을 자주 본다. 허재와 현주엽을 감독으로 내세우고 축구 선수 안정환과 이동국, 야구의 홍성흔과 김병현, 배구의 방신봉, 체조의 여홍철, 테니스의 이형택, UFC의 김동현과 윤동식 등 선수들의 우스꽝스러운 농구 도전기는 자연스럽고 리얼리티 한 예능이어서 좋다. 이 <뭉쳐야 쏜다>를 보다, 그동안 잊었던 농구에 대한 기억이 떠 올랐다.

 1990년대는 한국 농구의 전성시대였다. 농구가 이렇게 인기를 갖게 된 것은 1994년에 방영한 <마지막 승부>라는 드라마 때문이지 싶다. 이 드라마는 스포츠에 전혀 관심이 없던 여학생들을 농구 경기장으로 불러 모으게 된다. <마지막 승부>는 MBC 미니시리즈로 장동건, 심은하, 손지창, 이종원, 허준호, 박형준, 이상아, 신은경 등의 청춘스타들이 출연한 최초의 농구 드라마였다. 최고 시청률이 48.6%나 될 정도였고, 따라서 대중들의 농구에 대한 관심도 커진다.

 <마지막 승부> 덕에 당시 최고의 농구 대회였던 <농구대잔치>의 인기도 함께 치솟았고, 덕분에 스타 농구 플레이어들은 연예인 못지않은 대접을 누렸다. 물론 <마지막 승부>가 나오기 전에도 대학 농구의 인기는 대단했다. 고려대와 연세대는 실업팀들을 압도하는 실력으로 한국 농구를 이끌었다. 연세대는 ‘국보급 센터’ 서장훈, ‘컴퓨터 가드’ 이상민, 문경은, 우지원 등이 있었고, 고려대는 ‘매직 히포’ 현주엽, ‘에어본’ 전희철, 김병철 등의 호화 멤버로 <농구대잔치>의 정규 리그를 휩쓸며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그 앞, 1980년대 말에는 중앙대의 전성시대였다. 허재, 강동희, 김유택 트리오는 대학리그뿐만 아니라, 실업팀들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실업팀 기아가 창단되면서 모두 함께 간다. 거기에 한기범, 강정수 등 중앙대 출신이 합류하고 연세대 출신인 유재학, 정덕화마저 창단멤버로 확보하며 기아의 독주시대가 시작된다.

 경기내용 면에도 쉴새없이 터지는 3점슛과 번개같은 속공, NBA 선수들만 가능한 줄 알았던 덩크슛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농구대잔치>는 90년대 초반부터 명실상부한 겨울 스포츠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된다.

 이곳 토론토에도 1995년에 창단한 랩터스(Raptors)라는 농구팀이 있다. NBA 중에선 유일하게 연고지가 캐나다인 팀으로 2019년에 NBA 파이널 우승을 할 정도로 실력이 있다. 물론 창단 후 첫 챔피언 등극에 성공한 것이지만, 기라성 같은 미국팀들을 제치고 우승을 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토론토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축제분위기였다. 틈만 나면 독립시켜 달라고 조르는 퀘벡(Quebec) 마저도 잔칫집 분위기였다.

 하지만, 샴페인을 딴지 얼마 안되어 스타플레이들이 ‘돈의 유혹’에 못이겨 미국팀으로 이적하게 되어 지금은 전력이 예전같지 않다. 올해 랩터스는 캐나다정부의 방역지침으로 토론토에서 경기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이번 시즌동안 미국 탬파베이(Tampa Bay)를 임시 연고지로 사용하고 있다. 타지역을 1년 내내 홈으로 쓰게 되면서 기존의 홈 어드밴티지 이점을 거의 누리기 힘든 것도 경기력 저하의 원인일 수 있다. 하지만, 랩터스는 다른 팀에 비해 스타플레이어는 비록 없지만 나름 주머니 사정에 맞는 최선의 선택을 하여 최상의 결과를 내고 있다.

 지역적으로 보면 토론토가 미국의 변방이지만, 캐네디언이 ‘농구’하면 괜스레 자부심을 갖는 이유가 있다. 바로 농구를 만든 이가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이라는 점이다. 농구가 탄생하게 된 것은 북미지역의 추운 날씨 때문이다. 당시 매사추세츠주 YMCA 직업학교 체육교사였던 제임스 네이스미스(James Naismith)는 직장 상사로부터 학생들이 겨울철에도 즐길 수 있는 놀이를 만들어 보라는 지시를 받는다.

 당시만 해도 겨울철에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은 고작해야 체조나 무용 등이었는데, 학생들은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말썽을 피우기 일쑤였다. 그래서 네이스미스는 학생들이 흥미를 갖고 쉽게 배울 수 있는 실내놀이를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다 마침 어린시절에 동네친구들과 했던 놀이가 생각났다. 온타리오 알먼트(Ontario Almonte)라는 시골마을에서 자란 그는 종종 친구들과 주먹만한 돌을 바구니에 던져 넣는 놀이를 하곤 했다. 네이스미스는 이를 응용해 야채 바구니를 나무에 매달아 놓고 축구공을 넣는 놀이를 만들었다.

 네이스미스는 학생들에게 몇 번이나 강조했다. 럭비나 축구 같은 격렬한 운동이 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볼을 갖고 달리면 수비자가 이를 막으려고 태클로 저지할 것이 분명할텐데, 그 때문에 드리블 대신 패스로 볼을 골대 근처까지 옮기도록 규칙을 정했다. 공은 던지거나 튀기도록 하고, 슈팅은 머리 위에서 곡선을 그리도록 했다.

 1891년 12월, 대망의 첫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규칙을 이해시킨 네이스미스는 그때서야 가장 중요한게 빠진 것을 알게 됐다. 바로 축구공을 넣을 박스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체육관 관리인에게 “박스 2개만 급히 구해달라”라고 부탁했다. 한참을 찾아 헤맨 관리인은 박스 대신 복숭아 바구니 2개를 내밀었다. “뭐, 그것도 좋겠군.” 네이스미스는 복숭아 바구니를 3미터 높이에 매달았다. 농구가 오늘날의 ‘바스켓볼(Basketball)’이 된 결정적 이유다.

 그렇게 탄생된 농구는 세월이 지나 1932년에 국제농구연맹이 결성되고 통일된 농구 규칙을 만들어 세계에 보급한다. 그리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대회에서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지금의 겨울 스포츠로 자리잡게 된다.

 토론토의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집 앞마당에 설치한 농구대에서 농구를 하는 10대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가 한창 자랄 때는 학교에 가야만 농구골대가 있었다. 그나마도 농구장 양쪽 링을 수백 명이 나눠 사용해야 했으니 수업이 끝나면 경쟁하듯 농구장으로 뛰쳐나가야만 했다. 그렇게 농구장에 도착해도 벌써 수십 명이 다닥다닥 몰려들어 있었기 때문에 볼을 몇 번 던지다 보면 쉬는 시간이 끝나 버리곤 했다. 운동 후, 아무리 땀을 뻘뻘 흘리고 놀아도 수돗물에 얼굴 한번 씻어내면 세수 끝이다. 나에게도 농구를 땀냄새 날만큼 좋아했던 학창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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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5
어머니의 오그랑떡

 

 드디어 코비드-19 백신을 맞았다. 우리 집은 리치먼드 힐(Richmond Hill)이어서 욕(York)지역 커뮤니티 사이트에 들어가 신청을 했더니, 바로 접종 날짜를 주었다. 후유증이 있다고 ‘맞아야 되나, 미뤄야 되나’ 하는 얘기가 있었지만 나는 백신을  맞은 날 밤에 좀 어깨가 뻐근할 정도였고 이틀이 지나서는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화이자(Pfizer) 주사를 맞았는데 2차 접종은 112일 뒤에나 맞을 예정이다.

 백신을 맞은 다음날, 아내가 팥죽을 끓였다. 속으로 ‘4월에 갑자기 웬 팥죽 하며…’ 맛있게 한 그릇을 잘 먹었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액운이 떨어지라고 팥죽을 쑨 것으로 짐작된다.

동짓날 팥죽 쑤어 먹는 풍속은 중국에서 온 것이다. 중국 신화에 나오는 공공씨(共工氏)는 황하를 다스리는 신이었다. 황하의 홍수로 인해 강물이 범람해 그의 아들이 죽었다. 죽은 아들은 역귀(疫鬼)가 되어 수인성 전염병을 퍼트리는데, 병에 걸린 사람들이 뜨거운 팥죽을 끓여 먹고 영양을 보충해 병을 이겨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 즈음부터 붉은 색깔의 팥은 ‘양’을 상징하므로 ‘음’의 속성을 가지는 역귀나 잡귀를 물리친다고 알려진다.

아침마다 새벽 기도를 다니실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도 생전에 팥죽에 대한 이런 믿음이 강했다. 팥죽을 먹으면 병에 걸리지 않고 나쁜 일도 생기지 않는다고 믿었다. 자신의 편안 때문이 아니라 자식들의 건강과 앞날을 위해서였다.

동짓날은 물론이고 새로 이사를 가면 팥죽을 쑤어 이웃과 나눠 먹었다. ‘병이나 액운은 나만 괜찮으면 되는 게 아니고 이웃도 함께 해야 한다’ 라는 예부터 내려온 질기고 거룩한 믿음을 신뢰한 것이다.

이곳 토론토에서도 팥죽을 잘하는 음식점이 있다. 노스욕(North York)에 있는 <핀치 정수네 뚝배기>다. 이 집은 팥죽과 비슷한 팥칼국수도 파는데, 진한 팥 국물에 칼국수 면을 제대로 우려내 고국의 시장에서 먹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팥칼국수는 원래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먹었는데 팥물을 끓인 후 가라앉은 앙금에 밀가루로 만든 면을 넣고 끓여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하여 만든다. 팥칼국수를 먹을 때 전라도 방언으로 ‘싱건지’라 불리는 동치미와 묵은 김치를 곁들여 먹어야 제 맛이다.

 토론토 한인타운(Koreatown)에도 팥죽을 하는 곳이 있는데, 블루어(Bloor St.)와 크리스티(Christie St.)에 있는 <만나>이다. 이곳은 팥죽뿐만 아니라 호박죽, 깨죽 등도 판다.

 차이니스 레스토랑에도 팥죽을 파는 곳이 있는데, 우리 죽처럼 팥을 곱게 갈아 걸쭉하게 쑨 것이 아니고 알갱이를 푹 삶은 팥물에 단 맛을 낸 것이어서 그리 깊은 맛은 없다. 주로 메인 음식을 먹은 후에 후식으로 먹는데 콘지(congee)를 파는 음식점은 대부분 팔고 있다.

 

 

 어머니는 팥죽 말고도 오그랑떡이라는 것을 자주 만드셨다. 오그랑떡은 멥쌀가루를 익반죽 하여 경단을 빚어서 팥과 같이 부드럽게 삶아낸 떡이다. 떡을 삶을 때 그 모양이 동그랗게 오그라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오그랑떡은 주로 함경도 지방에서 발달했는데, 다른 떡에 비해 부드럽고 말랑해 어린이나 노인들이 먹기 좋다. 떡의 주 재료인 붉은팥은 밥맛이 없거나 잠이 안 올 때, 신경쇠약 증세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떡을 만들 때는 약한 불에서 팥물이 경단에 배이게 은근히 끓여주어야 부드럽고 맛있는 오그랑떡을 만들 수 있다. 어렸을 적에 나는 오그랑떡을 만든 날이면 보자기에 싼 떡을 들고 어머니를 도와 근처 친척집으로 날랐던 기억이 있다.

 떡은 곡식을 가루 내어 찌거나 삶거나 기름으로 지져서 만든다. 찌는 떡은 만드는 과정이 좀 복잡해서 가정에서 만들기 쉽지 않지만, 삶은 떡과 지지는 떡은 비교적 만들기가 간편해 가정에서 많이 만들어 먹었다.

 

 

토론토로 이민 오기 전에 ‘혹시 떡장사나 한번 해볼까’ 해서 떡집 자료조사를 한 적이 있다. 기억나는 곳이 서대문구 이화여대 앞에 있는 <호원당>이라는 곳이었는데, 마침 친구가 그곳 제품 포장 디자인을 하고 있어서 벤치마킹을 했었다.

<호원당>은 3대가 이어온 유서 깊은 떡집인데, 진기한 궁중떡을 일반화한 고급 떡집이다. 그래서 이런 고급 떡을 해외에서 만들어 팔면 어떨까 싶었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오래된 교민들은 가정에서 웬만한 떡은 만들어 먹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교민들의 생활수준이 고급 떡을 사 먹을 정도의 경제적 환경도 아니어서, 떡장사는 머릿속 구상으로 그치고 말았다.

요즘은 좋은 떡집들이 많은데, 페이스북의 <토론토 맛집>이 추천한 <달제과(Luna Bakery)>이라는 곳은 매일 새로운 전통떡을 만들어 선보인다. 손힐(Thornhill)의 돈캐스터(Doncaster Ave.)에 있는데, 일반 슈퍼에는 납품하지 않고 자체 매장에서만 판매하는 곳이어서 가격이 조금 비싸지만 신선하고 맛있다. 소량을 만들어 당일에 재고 없이 다 파는데, 가끔 오그랑떡 비슷한 새알로 만든 단팥죽도 맛볼 수 있다.

 떡은 사람 사이에서 ‘끈적끈적한 관계’를 뜻한다. 그래서 떡은 이웃과 고루 나눠 먹었다. 예부터 ‘덕(德)과 떡은 나눠 먹으면 훈훈하고 더 맛있다’고 한다. ‘떡’ 자에서 ‘ㄷ’ 하나만 떨어지면 덕이라고, 떡의 어원이 덕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원의 옳고 그름을 떠나, 덕은 베풀어야 하고 떡은 나누어야 떡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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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hyunsoo
황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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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8
‘와룡매’가 알리는 조선 침탈

 

 5년 전 서울에 계시던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황망하게 지내던 때, 여수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촌동생이 “바람 쐬러 한번 내려오세요”해서 갔었다. ‘근처 순천에 있는 선암사나 다녀오자’라고 해서 따라나서는데, 사찰에 오르며 복잡하고 어수선한 마음이 안정되는 분위기였다. 주차장에서 절까지 오르는 길이 넓게 잘 닦여져 있었고 도로 양옆에 늘어선 나무들도 꽤 나이를 먹은 듯 풍치를 보탰다. 아직 쌀쌀한 겨울이어서인지 산사는 매우 조용하고 사람들이 없었다. 안내를 해준 사촌동생이 좀 머쓱했는지 “절부터 운수암까지 오르는 담길에 있는 50여 그루의 매화나무에 꽃이 필 때면 많은 관광객이 온다”고 귀띔한다.

 선암사에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백매화와 홍매화 나무가 있는데, 사찰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에 심은 것이라 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아직 매화가 피지 않았지만 가지만으로도 그 틀의 기품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매화는 봄이 왔음을 알리는 꽃이다. 매화꽃 위로 눈이 내리면 설중매, 달 밝은 밤에 보면 월매, 옥같이 곱다 해서 옥매, 향기를 강해 매향이라 한다. 조선시대에 양반가의 선비들이나 풍류를 즐기던 시인들은 매화를 사랑했다. 이들 양반가들을 주 고객으로 했던 옛 기생들의 이름에도 매화가 많이 들어갔는데, <춘향전>에서 성춘향 엄마의 이름이 월매이기도 하다. 조선 양반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매화를 좋아했다.

 일본 동북지방 미야기 현, 마쓰시마에 가면 즈이간지(瑞巖寺)라는 사찰이 있는데 그 앞마당에 800여 년이 된 매화나무 두 그루가 있다. 옛날 이 고장의 영주였던 다테 마사무네가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고 조선에 출병했다가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이다.

 이 조선 매화는 용이 누워 있는 것 같다 하여 '와룡매(臥龍梅)'로 이름 지어졌다. 본당에서 바라볼 때 왼쪽은 붉은 꽃을 피워내는 홍매화이고, 오른쪽은 하얀 꽃잎을 내미는 백매화다. 이 꽃들은 해마다 4월 중순쯤 꽃망울을 터트려 보름가량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영주였던 다테 마사무네는 예술가적 심미안을 지녔던 인물로 일본 내에서 처음으로 로마 교황청에 사절단을 파견할만큼 의식이 앞섰다. 다섯 살 때 천연두에 걸려 한쪽 눈을 잃은 마사무네는 애꾸눈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는지, 임진왜란이 나자 전시 첫해에는 동원력의 두 배인 3천 명을 보낸다. 또한 이듬해는 직접 바다를 건너가 진주성을 공략하는데 그때 나이가 27살이었다. 부산을 거쳐 한양까지 거침없이 올라가 창덕궁까지 진격한다. 그곳 선정전 앞에 있던 400년 된 와룡매에 반해 전리품으로 뽑아 챙긴다. 6개월간 참전한 후, 일본으로 귀국할 때 그 조선 매화를 가져와 가문의 선종 사찰인 즈이간지에 심은 것이다. 

 

 제2차 대전 당시 이 지역은 미군의 폭격을 받아 대부분 초토화됐지만 이 사찰은 가까스로 화를 면해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고 조선 매화 역시 본당 앞마당을 지키며 푸르름을 떨치고 있다. 이 절의 조선 매화가 1999년에 자목(子木)의 형태로 귀환해 눈길을 모은 바 있다. 두 그루에서 얻어낸 자목을 사찰 측이 일제의 한국 침탈을 참회하는 의미로 서울 남산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기증한 것이다. 약 400년의 세월을 건너 분신으로나마 고국에 돌아온 셈이다.

 이 사찰 근처에 있는 마쓰시마는 일본의 3대 절경으로 꼽힐 정도로 풍경이 좋은 곳이다.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도 1970년대 중반에 이곳에 있는 도호쿠대학을 자주 찾았다. 반도체의 세계적 권위자인 니시자와 준이치 교수에게 자문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삼성이 반도체 부문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니시자와 준이치 교수는 이병철에게 ‘반도체 사업을 하지 마라’고 했다. 그만큼 개발도 어렵고 한국의 과학기술로는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병철은 “일본이 할 수 있으면 한국도 할 수 있다”며 밀어붙였다. 초창기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무척 어려워서 가전부문에서 번 돈을 빈도체에 다 쏟아 부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 결단이 삼성뿐만 아니라 한국이 IT 산업국으로 가는 계기가 된다. 당시 도호쿠대학을 방문했을 때 이병철이 근처에 있던 즈이간즈 사찰을 갔을 거라는 짐작을 한다. 혹시 이병철은 와룡매를 보며 용처럼 뻗어 나가는 반도체 사업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곳 토론토에서는 매화나무를 구경하기 쉽지 않다. 그나마 매화나무를 좋아하는 몇몇 한국 교민들이 집에다 관상용으로 심어 놓은 것이 전부다. 매화는 영어로 팜(Plum)이지만, 묘목 파는 곳에 가서 팜을 찾으면 대개 모른다. 그래서 시로 팜(Shiro Plum)이라고 해야 알아듣는데, 그나마도 있는 곳이 거의 없고 가격도 비싸다. 공원이나 들에 매화나무처럼 생긴 것이 있어 가까이 가 보면 대개 벚꽃나무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 후에 캐나다 정부에게 기증한 것들이 새끼를 쳐서 공원마다 심어져 있다. 일본은 벚꽃 외교를 전 세계적으로 펼치고 있는데, 그래서 세계 주요 도시마다 벚꽃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국 워싱턴 벚꽃인데 특히 포토맥 강변의 매화는 봄철 세계적인 관광거리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일본 사찰에 있는 와룡매는 자연스럽게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의 조선 침략과 약탈을 스스로 알리고 있다. 조선 창덕궁의 와룡매를 일본에 가져 간, 마사무네의 유훈이다. "어짐이 지나치면 약하게 되고, 의로움이 지나치면 고집스럽게 되고, 예의가 지나치면 아첨하게 되고, 지혜가 지나치면 남을 속이게 되며, 믿음이 지나치면 손해를 입게 된다" 우리 조선에게 주는 가르침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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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hyunsoo
황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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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1
매화나무에 참새가 앉은 모습, ‘매작과’

 

 신입사원 시절, 일년에 두번 정도 돌아가며 숙직을 섰다.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근무했는데, 주로 시청자들의 민원전화를 받거나 비상시에 담당부서에 연락하는 것이 주업무다. 경력사원과 신입사원이 2인 1조로 숙직을 했는데, 전화는 주로 후배가 받았다.

 

 밤 11시경에 벨이 울렸다. “네, 엠비씸니다.” 상대방이 대뜸, “야, 사장 바꿔!” 놀라서, “네? 누구시죠?” 술을 한잔 드신 듯 무턱대고 “느네가 이렇게 드라마를 엉망으로 만드니까, 나라꼴이 이 모양이지. 무슨 고려시대에 시녀들 옷이 다 조선시대 것이니 말이 되냐?”하며 시비조로 시작한 대화가 20여 분이 지나도 끊지를 않자, 옆에서 듣고 있던 선배가 그냥 끓어 버리라고 사인을 계속 보낸다.

 그래서 “네, 예~ 알겠습니다.” 하며 대충 얼버무리고 끓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전화해댔다. 그 목소리다 싶으면 바로 끊었다. 그렇게 5~6번째 벨이 울리자 참다못한 선배가 전화를 받아 “여보세요. 누구신지 성함과 전화번호를 알려주십시오?” “뭐, 내가 누군지, 니가 알면 어떡할 거야” 선배가 “성함을 말씀하셔야 저희가 조치를…”

 “뭔, 개수작이야. 나랑 한번 해보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엠비시를 안 보는 거야.” 선배가 “뭐라고요? 어르신, 말씀이 지나치신 것…” 하자, “야, 이 새끼야! 이제부터 다시는 엠비시 안본다…”며 욕을 하자 선배가 화가 나서 “그러면 보지 마세요” 하며 수화기를 던져 버렸다. 나는 놀라 재빨리 전화선을 뽑아 버렸다.

 1980년대의 웃지 못할 방송사 숙직실 모습이다. 당시 사극 드라마 경우에는 제작비가 충분치 않아서 주요 배역들이 아닌 시녀, 포졸 같은 단역배우의 의상은 시대와 상관없이 거의 비슷한 의상을 돌려가며 입었다. 무대 배경도 지금처럼 야외 촬영이 아니라 스튜디오 촬영이 대부분이어서 무대 배경이나 소품들이 시대에 맞지 않게 엉뚱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사극 드라마가 방영된 날에는 이런 비슷한 항의 전화가 많았다.

 지난주에 SBS 퓨전사극 <조선구마사>가 방영 2회 만에 전격 폐지됐다. 역사 왜곡 논란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누리꾼들의 압력을 버티지 못한 것으로 풀이된다. SBS에 따르면 애초 16부작으로 기획됐던 드라마는 80% 촬영을 마친 상황이라고 한다. 제작비도 320억 원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구마사>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태종과 훗날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이 악령에 맞서 벌이는 혈투를 그린 판타지 드라마다. 첫주 방송이 나가자마자 중국풍 논란에 휩싸였다. 첫 회에 방송된 연회장면이 문제가 됐다. 중국 명나라를 통해 조선에 들어온 가톨릭 구마 사제를 맞이한 식탁에 월병, 삭힌 오리알, 중국식 만두 등이 올랐고, 극중 의상과 군사들이 사용하는 검(劍)이 중국 것이란 지적을 받았다.

 동북공정으로 커지는 반중 정서에 불을 지피며 시청자 불만이 폭발하자 주요 광고주들이 광고 철회를 한다. 실제로 중국에서 일부 누리꾼들이 <조선구마사>의 해당 내용을 지적하면서 "한국은 중국문화를 베껴갔다"는 식으로 공격한다는 보도가 전해지면서 서둘러 드라마를 내린 것이다.

 

 하지만 무슨 판타지 드라마에 그렇게까지 의미를 둘 필요가 있냐는 의견도 있다. 음식평론가 황교익은 페이스북에 “한국 TV 역사 드라마는 몇몇 등장인물 외에는 완벽한 판타지”라며 “<대장금>에 나오는 음식은 조선에 있었다고 생각하세요?”라는 글을 올렸다.

 이어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볼까”라며 “조선 왕이 장금이 같은 궁녀가 요리한 음식 먹으며 이게 맛있네 저게 맛없네 품평을 했다고 생각하나? 판타지면 판타지로 보고 말지”라는 글을 올리기도 한다.

 나는 아무리 판타지 드라마라도 조선 식탁에 중국의 대표과자인 월병을 놓은 것은 세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 지나간 일이지만 월병 대신, 조선다과로 바꿨으면 어땠을까 싶다. 조선다과인 매작과(梅雀菓) 말이다. 매작과는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과자다. 밀가루에 참기름, 꿀을 넣고 기름에 지져서 만드는 후식이다. 옛날에는 제사, 혼례, 연등회 등에 많이 쓰였고 주로 명절에 만들어 먹었다.

 


 매작과는 밀가루를 기름에 튀겨 만드는데 여러가지 천연재료를 섞어 다양한 색상과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 매작과는 이름부터 아름답다. 매화 매(梅), 참새 작(雀)을 써서 매작과(梅雀菓)라고 부르는데, 과자의 모양이 ‘마치 매화나무에 참새가 앉은 모양과 같다’는 뜻을 갖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밀가루로 튀긴 유밀과를 만들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는 불교국가라 살생을 금했기에 어육류를 제사상에 올릴 수 없었는데, 그것 대용으로 물고기 모양의 유밀과나 매작과 따위를 제사상에 올렸다. 튀김 과자의 소비량이 지나치게 많아지자 제사상에 유밀과 대신 과일을 올리게 했다고 한다. 그만큼 밀가루와 기름이 비싸고 귀했던 시절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매작과를 좋아했다. 그 당시 고려병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지금도 몽골의 과자 중에는 이 때의 교류로 영향을 받은 매작과와 모양이 비슷한 과자가 있다고 한다.

 또한 춘향전에서 암행어사 이몽룡이 출두할 때 변사또가 한손에 매작과를 들고 깨작거리고 있는 장면이 있다. 변학도는 남원(도호) 부사인데 도호부사는 종3품 관직이다. 현대 군대로 치면 준장급이다.

 당시 밀가루나 조청이나 모두 사치재로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승급조차도 사사로이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일개 도호부사가 매작과를 먹어댔으니 얼마나 부정부패와 수탈로 얼룩진 자인지 알만한 노릇이었다.

 한편에 20억 정도를 드린 드라마가 누리꾼들에 의해 바로 내려지는 시대가 되었다. 셀폰의 인공지능 앱으로 중무장한 똑똑하고 적극적인 시청자들 때문에 이제 과자 하나라도 허투루 놓았다가는 곤욕을 치를 수 있다. 그때그때 검증과 확인을 거쳐 뜻을 같이 하는 누리꾼들을 모아 여론을 모은다. 돌이켜 보면 1980년대 숙직실에 전화를 했던 누리꾼들은 진정한 열성 사극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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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hyunsoo
황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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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5
굳이 먼 데를 기웃거리지 마라

 

 몇 주 전부터 식탁에 앉아 밥 먹을 때면 초파리가 날아다녔다. 처음에는 한 두 마리가 보이더니 며칠 전부터는 음식만 차려 놓으면 떼지어서 주인보다 먼저 맛을 본다. 그러려니 하면 되는데 그걸 또 못 참아서 양손으로 손뼉 쳐 잡기도 하고 앉아 있는 놈을 살며시 검지로 누르기도 하는데 워낙 빨라 좀처럼 잡을 수 없다.

 초파리의 이동을 눈여겨보니, 지난 겨울에 파 두 단을 심어 놓은 화분에서 이착륙을 하느라 바쁘다. 화분에다 알을 깐 것이다. 그래서 아예 그 화분을 밖으로 내놨는데도 초파리들은 계속 줄지 않았다. 파 심어 놓은 화분 옆, 알로에 화분 두 개도 의심스러워 밖에 내놓았지만, 초파리는 없어지지 않았다. 내친김에 화분 옆 환기통도 테이프로 막고, 조금 떨어져 있던 제라늄 화분도 내놨다. 그리고 이것저것 찾아보니, “화분 위 흙을 가는 모래로 막아 주면 초파리들이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해서 관상용 모래를 좀 사다가 남은 화분들을 덮어주었다. 그제서야 티끌같은 놈들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보람 뒤에는 밤 사이 추위를 이기지 못했던 알로에와 제라늄의 장렬한 희생이 있었다.

 그래도 초파리는 좀 낫다. 아직은 날씨가 쌀쌀해 나타나지 않지만 조금만 있으면 모기들 차례다. 한국의 모기들은 물리고 난 뒤 근지러워서 알게 되지만, 이곳 토론토 모기들은 힘이 좋은지 물리는 순간부터 무척 따갑다. 그래서 늦은 봄부터 가을 초까지 야외에서는 모기를 조심해야 한다. 트레킹을 하다가 조금만 길을 벗어나 숲이나 잡초 사이를 지나려면 모기 밥이 되는 걸 각오해야 한다.

 며칠 전 책장에서 다산 정약용의 책을 우연히 찾았다. 10여 년 전에 한국 갔다가 오는 길에 사왔는데 앞에 몇 줄 읽고 접어 둔 것이다. 이번에 찾아 반가운 마음에 620여 쪽을 사흘에 나누어 다 읽었다. ‘왜 진작 보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흥미로운 내용들이 꼬리에 꼬리를 이어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정민 교수가 쓴 <다산선생 지식 경영법>이다. 쉽게 말해 다산의 공부법을 정리한 것이다. 다산은 18년간의 강진 유배 생활 동안 수백 권의 저술을 남겼는데, 한 사람이 베껴 쓰는 데만도 10년이 걸릴 정도의 작업을 그 척박한 작업 환경 속에서 해냈다.

 다산도 모기를 무척 싫어했다. ‘모기를 증오한다(증문·憎蚊)’는 글까지 남길 정도였다. 귀향 가 있던 강진에서 1804년(43세) 여름에 지은 것인데, 모기를 맹호나 뱀보다 무서운 존재로 묘사했다.

“사나운 호랑이가 울 밑에서 으르렁대도 나는 코 골며 잠잘 수 있다. 구렁이 한 마리 처마 끝에 걸려 있어도 그저 누워서 똬리 트는 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모기 한 놈 앵앵대는 소리 귀에 들리면, 나는 기겁하고 만다. 오장이 졸아붙고 간담이 서늘해진다. 모기 너는 주둥이를 박아서 피를 빨면 그것으로 족해야지, 어이하여 독을 쏘아 뼛속까지 스며들게 하느냐. 삼베 이불 꼭 덮고서 이마만 겨우 내놓아도 잠깐 만에 울퉁불퉁 부처 머리 같아진다.”

 모기들의 횡포에 속수무책 시달리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자신의 처지를 답답해했다. 다산은 부패한 세상에 분노하고, 자신의 큰 뜻을 펴지 못한 절망을 시문으로 달랬다.

 1994년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기행문이 발표되고, 인문 도서 최초로 백만 부를 돌파하며 남도 답사 열풍을 몰고 왔다. 나도 그 유행 따라서 강진 다산초당에 콧바람 쐬러 간 적이 있다. 그때는 다산에 대해 그리 관심도 없고 그저 조선의 실학자 정도로 알고 있을 때였다. 강진 읍내에서 다산 초산까지 걸어서 올라갔는데, 당시만 해도 여기가 다산초당이 맞나 싶을 정도로 팻말도 없고 진입로도 찾기 어려웠다. 산 깊은 곳에 위치한 다산초당은 가는 길은 등산로였다. 입구에서 10여분 정도 올라 가면 있었는데, 정비된 길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길이었고 빽빽한 동백나무 숲으로 둘러 싸여 있어 들어서자마자 깊은 숲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초가을이었지만, 올라가는 동안 사람을 마주치지 않다 보니 심리적으로 멀게 느껴졌고 거친 숨을 쉴 정도로 힘이 들었다. 다산초당은 기와집 두 채였는데, 원래는 초가집이었던 것을 복원할 때 기와로 지은 것이라 했다. 외딴곳이라 엉성한 관리로 방안에 곳곳에 흙 먼지며 나뭇잎들이 있을 정도였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네모난 연못, 채마밭, 개울에서 물을 끌어와 작은 폭포를 만들고, 돌을 쌓아 동그란 섬을 만들었다”고 정원을 멋있게 표현했는데, 내 눈에는 그저 귀향 온 사람이 자취 생활한 흔적으로만 보여 좀 실망했다.

 

 이번에 다산의 책을 읽다 보니, 당시 내가 얼마나 눈이 어두웠는지를 깨달았다. 원래 초당은 말 그대로 초가집 한 채가 덩그러니 있을 뿐인 초라한 공간이었다. 다산이 이 곳으로 옮겨온 뒤에 초당은 점점 환한 공간으로 바뀐다. 먼저 비탈을 깎아 아홉 층으로 돌계단을 쌓고, 거기에 채마밭을 만들었다. 층마다 씨앗을 구분해서 뿌렸다. 무와 부추, 늦 파와 올 배추, 쑥갓과 가지를 심었다. 아욱, 겨자, 상, 토란 등도 심었다. 시늉만 낸 작은 연못도 넓게 팠다. 둘레에 있던 떡갈나무와 싸리나무는 베어내고 대신 단풍나무와 느릅나무를 심었다.  대통을 이어 샘물을 끌어들였다. 새끼 물고기도 몇 되 풀어놓았다. 올챙이도 거기서 자랐다. 울타리가 터진 곳은 대나무로 채우고, 양편 언덕엔 버드나무를 심었다. 백련사 스님이 연뿌리를 보내왔다. 당귀, 작약, 부양, 수구화, 모란이 여기저기서 돋아났다. 파초를 구해 심었다. 포도덩굴은 울타리를 타고 올랐다. 바닷가에서 온갖 기이한 모양의 괴석을 주워 마당 곳곳에 꾸몄다. 이렇게 해서 초당은 온전히 다산의 체취가 스민 공간으로 거듭났다. 초파리와 모기 같은 벌레들에게도 훌륭한 정원이었다. 

 다산은 말한다. 일상의 공간에 마음을 쏟아라. 굳이 먼데를 기웃거리지 마라. 내가 사는 공간에 정성을 쏟아 그곳에서 일상의 기쁨을 만끽하라. 몸은 비록 티끌 세상에 묶여 있어도 마음은 훨훨 자유로운 경계 속에 노닐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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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8
이병철 맏손녀의 영화 사랑

 지난해 이맘때, 한국 언론의 관심은 <코비드 19>보다는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받느냐?”였다. “아마, 아카데미 수상은 어려울 것 같다”라고 많은 평론가들이 말했지만 시상식에서 무려 4개의 상을 받아 우리를 놀라게 했다. 당시 봉준호 감독은 벌써 세 번이나 무대에 올라와 수상소감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작품상을 수상할 때 감독과 배우, 스텝이 우르르 올라왔다. 봉 감독이 제작자 곽신애 대표에게 수상소감을 부탁한다. 그 뒤를 이어 자그마한 여인이 말을 이어가는데, 그때까지 시청자들은 “저 여자는 누구지? 어느 장면에서 나왔더라?”하며 의아해했다. 붉은색 머리를 위로 꼬아 올리고 검은 빈티지 재킷을 입은 여인이었다. 미리 준비한 듯 고급진 영어에 “아, 배우 중에 통역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대표로 소감을 준비했나 보다”라고 생각한다.

 다음날 언론은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받은 것 이상으로 마지막 수상소감을 한 여인에 대해 주목한다. 그녀는 CJ그룹 이미경 부회장이었다. 그런데 “아니, 영화에 돈 투자하면 다냐?”라든가, “잘난 체하며 언니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등의 부정적인 기사가 신문을 도배한다. 하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을 잘 아는 비평가들이 “원래 작품상 소감은 제작자들이 하는게 관례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분위기가 바뀐다. 이 부회장은 <기생충>의 책임 프로듀서로 참여했고 영화 배급도 담당했기에 그녀의 수상소감은 당연하다는 설명이다. 또한 영화홍보와 수상을 위해 100억 원에 달하는 비용을 지원했다는 가십성 기사가 돌며 여론을 긍정으로 만든다.

 한국인의 대개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부자를 싫어한다. 그래서 부자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면서도 뒤로는 경시하거나 깔보며 묘한 감정을 즐기기도 한다. 이 부회장의 수상소감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그런 마음이 깔려 있던 건 아닐까 싶다. 영화 전문가들은 “그녀가 수상소감을 한 것은 <기생충> 관계자들이 미리 준비한 순서였다”고 한다. 그녀는 평소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거북해한다. 그래서 소심한 편이고 유전성 신경질환으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해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지만 당일은 한국관객들에게 감사의 마음 전하고 싶어 용기를 냈다는 것이다.

 이미경은 선친이 유학 중이던 1958년 미국 미시간주에서 태어난다. 아버지가 이건희 회장의 형인 이맹희이다. 이맹희는 삼성가의 맏아들이었지만 아버지 이병철과 사이가 안 좋았다. 그렇지만, 이병철은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야무진 맏손녀 이미경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아마 이맹희가 삼성을 승계받았다면 이미경의 삶도 달라졌을텐데…”라는 생각을 해본다. 경기여고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학원에서 석사를 했는데, 그때부터 한국문화 콘텐츠를 바탕으로 한국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결혼은 평범한 회사 사원인 김석기와 했다가 이혼하는데 슬하에 자식은 없다. 그후 전 남편은 배우 윤석화와 재혼했고 이미경은 혼자 살고 있다. ‘영화에 미친 일벌레’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추진력이 강하고, 그녀 스스로가 “나는 이병철 회장의 DNA가 흐르고 있다”는 자부심도 강하다.

 한국영화의 세계 시장 진출은 CJ그룹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CJ는 미국 할리우드에 2004년에 진출하는데, 단순히 한국영화 수출 수준이 아닌 제작사로서 직접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그 중심에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있다. 2014년 말, 이 부회장이 갑작스럽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데, 수감 중이었던 이재현 회장을 대신해 의욕적으로 그룹을 이끌어오던 때라 말들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재판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이 이미경 부회장의 퇴진을 압박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청와대 조원동 전 수석은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CJ가 걱정된다. 손경식 회장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그만두고 이미경 부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얘기를 들었고, 이를 손경식 회장에게 전한다.

 이 부회장이 박근혜 정부로부터 미운털이 박힌 배경에는 CJ그룹이 제작한 방송 문화 콘텐츠 때문이다. 국가정보원은 2013년 8월부터 CJ그룹을 사찰한 뒤 ‘CJ의 좌편향 문화사업 확장’을 청와대에 보고한다. 여기에는 tvN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패러디한 캐릭터가 ‘욕설을 가장 많이 하고 안하무인의 인물로 묘사했다’는 지적을 한다. 당시 대선을 앞두고 있던 박 전 대통령은 이에 대해 몹시 불편해했다.

 이밖에도 CJ는 <광해, 왕이 된 남자>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한 영화 <변호인>등 좌파 계열의 영화에 투자하며 박근혜 정부의 미움을 산다. 이병철의 맏손녀가 좌파라고? CJ와 좌파, 얼핏 봐도 잘 납득이 가질 않는 조합이었는데, 영화 투자를 좌우 진영논리로 본 것부터 균형없는 시각이었다는 평이 많았다.

 

 이 부회장은 경영에서 물러나 미국에 가있는 동안 영화산업을 직접 챙겼다. CJ가 공들이는 지역은 세계 영화시장의 본거지인 ‘할리우드’였다. CJ 엔터테인먼트는 이미 미국 영화업계에서도 ‘아시아에서도 가장 역동적인 스튜디오이자 제작사’로 평가받고 있고, 작품 10여 편을 미국 제작사들과 공동으로 제작하고 있다.

 CJ가 미국 진출 초기에 노렸던 타깃은 미국에 살고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 1200만 명과 한국계 미국인 200만 명이었다. 미주지역 아시아계 영화의 유통, 배급의 60%를 CJ가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CJ는 미국에서 영화관도 직접 운영한다. 현재 CGV는 한국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LA의 한인타운 근처와 오렌지카운티의 부에나파크,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 멀티플렉스 극장을 직접 운영하며 25개의 상영관을 가지고 있다.

 CJ 덕인지, 10여 년 전부터 이곳 토론토에서도 한국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다. 한국 개봉작을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같은날 상영하니, 따끈따끈한 고국문화를 즐기게 된 것이다. 앞으로도 CJ 같은 기업들이 한국영화 투자를 계속해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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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1
“아재, 즉금 무스 거 하오?”

 

 우리 어머니는 1931년에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셨다. 다섯 살 때 부모님을 따라서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길림성 연길로 간다. 연길에서 차로 2시간 정도 더 들어가면 왕청현 하마탕이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조선인 100여 가구가 모여 담을 쌓고 성을 쌓아 그 안에서 농사짓고, 가축도 키우며 살았다고 한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호랑이, 토끼, 노루 등 야생 짐승도 잡아먹는 험한 산골이었고, 비적(도적떼)들이 나타나면 동네사람들이 힘을 모아 싸울 정도로 척박한 오지였다.

 

 그러다가 광복을 맞이한 다음 해인 열다섯 살 때, 회령에 있는 이모네로 혼자 살러 간다. 마침 이모부가 보통학교 교감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외할머니는 막내딸에게 글공부도 시키고 도시 맛이라도 접하게 해주고 싶어, 언니에게 청을 한 것이다.

 

 두 해가 지나서 38도선 이북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공산 치하가 되었고, 일제시대에 부역을 한 사람들은 모두 인민재판을 받아야 했다. 일제 강점기에 보통학교 교감을 한 어머니의 이모부도 재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당 고위 간부가 학교 제자라 눈감아 주었지만, 언제까지 무사할지 모를 일이었다.

 

북한 점령군이던 소련군이 1948년 12월에 시베리아로 철수하며 미군도 남한으로부터 철수하라고 요구하며 정치적 공세를 펼친다. 1950년 정초에 전쟁이 터질 거라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았다.

 

 벌써부터 북한의 민족주의자, 종교인, 교육자, 지주, 기업가, 기술자들은 철저히 숙청을 하고 있을 때라 이모부 가족들도 몰래 피난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모할머니는 “오늘 밤 가족 모두 남한으로 피난 간다. 너도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혹시 가기 싫으면 지금 보따리를 싸서 연변으로 돌아가라. 만약 혼자 이곳에 있다가는 공산당원에게 잡혀가 곤욕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갑자기 혼자서 연변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너무 두려웠다. “그럼, 피난 갔다가 언제 돌아오는 거예요?”라고 물으니, “빠르면 몇 달이고, 늦어도 일 년 안에는 돌아올 것 같다”는 말에 길을 따라 나선다.

 

그때 이모할머니가 어머니를 데리고 피난을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뒤 이모할머니는 평생 동안 어머니를 친 딸처럼 보살펴 주었다. 그렇게 회령을 떠난 어머니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실향민들에게 고향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데, 어머니 주위에도 고향 사람들이 많았다. 함경도 말은 좀 투박하면서도 억센 느낌을 주어서 뜻을 잘 모르면 무슨 시비를 거는 듯한데, 그런 인상을 받는 것은 중국말과 비슷한 음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함경북도에서는 할아버지를 ‘아바니’ 또는 ‘큰 아바이’라 한다. 고모부, 이모부, 외삼촌은 모두 ‘맏아바니’ 또는 ‘몯아바니’라 한다. 남자의 경우 삼촌은 ‘아즈 바니’라 하고 여자의 경우 고모, 이모, 숙모는 ‘아재’라 한다. 부계와 모계의 구별이 없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 위냐 손 아래냐에 따라 호칭이 달라진다.

 

 흔히 쓰는 방언으로 가메치(누룽지), 안깐이(아낙), 동삼(겨울), 겡게(감자), 아지(나뭇가지)등이 있고, 러시아 방언이 뿌리내린 비지께(성냥), 마선(재봉틀), 거르마니(호주머니) 따위가 있다.

 

일제하 식민지 백성들의 애절한 삶을 기록한 이용악, 윤동주, 이태준의 문학 작품 속에서 함경도의 옛 방언을 만날 수 있다. “내 밥우 먹습꾸마.”라든가, “무스 거 하암둥? 일으 하기 입소. 자! 인차 집 우루가기오.”라는 글이 나온다. “일으 거 하갯는데 버뜩 대 못 들구서, 이래시문 둏을까 더래시문 둏을까 매삼질한단 말이오(일을 하려는데 버쩍 대들지 못하고, 이러면 좋을까 저러면 좋을까 안절부절못한단 말이오)”라든가, “어딜 떠 못 나구 영게서 한 뉠 살았디(어디로 못 떠나고 여기서 한평생을 살았지.)”라는 글도 보인다.

 

함경도하면 백두산과 그 언저리에서 펼쳐진 파란만장했던 민족사를 떠올리게 된다. 오래된 이야기다.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후 지금의 함경도는 여진족의 차지가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몽고의 내침 이후, 여진족을 몰아내며 고려의 많은 유이민들이 함경도 땅으로 옮겨가 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고려 말, 조선 초기에는 두만강 유역의 함경도와 두만강 너머에 꽤 많은 고려인이 살았다.

 

용비어천가에는 그 무렵 선인들의 자취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 이안사가 전북 전주를 떠나 함남 원산 부근을 거쳐 정착한 오동(斡東)은 지금의 중국 길림성 훈춘시 경신진이란 곳이다. “두만강을 따라 펼쳐진 넓고 비옥한 평원, 그곳을 아름답게 수놓은 여덟 개의 호수와 러시아를 국경으로 한 길게 뻗은 산줄기에 목조(이안사의 호)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의 여기저기를 훑어보면, 세종대왕이 왜 그토록 함경도 땅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곳이 고구려의 옛 땅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선조가 조선 창업의 터를 닦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2014년에 방영된 KBS 사극 '정도전'에서 이성계(유동근)가 친위 사병들을 이끌고 나가며 외친다. "내레 한마디만 하갔어. 둑디 말라우!" 이성계가 걸쭉한 함경도 말투를 쓰자 시청자들은 낯설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성계는 당시 변방이었던 함경도 사람이어서 사투리를 쓰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제작진의 설명이었다.

 

정통 TV 사극에서 주연급 배우가 사투리, 그것도 함경도 사투리를 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지만, 덕분인지 평균 시청률이 15.8%로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해 화제가 됐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일 년에 한 번 열리던 <회령군민회>라는 모임에 참석하였다. 비원이나 창덕궁 같은 고궁에서 열렸는데, 회령에서 온 실향민들이 모여 도시락도 먹고 술래잡기, 보물찾기 등도 해 상품을 받은 기억이 있다.  

 

어른들의 함경도 사투리 속에서 “아재, 즉금 무스 거 하오?”는 내가 그나마 알아듣는 말이었다. 꼭 그런 모임에는 흥에 겨워 노래를 불러 대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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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4
꺼벙아, 좋아했는데 잘 안되더라

 

 우리 가족에게 ‘꺼벙이’라는 반려견이 있었다. 딸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 아르바이트를 갔다가 작은 요크셔테리어를 안고 왔다. 일하는 곳에서 “강아지를 너무 예뻐하니까 키워 보라고 주었다”고 한다. 당시 우리 부부는 아직 이민 정착도 제대로 못하고, 가게를 맞교대해야 하는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딸아이에게 “지금은 강아지를 돌볼 여력이 없으니, 다시 돌려주자”라고 타일렀다. 달래고 윽박지르고를 여러번 해도 답이 안 나오자 아내가 중재 안을 내놨다. “이왕 가져왔으니 며칠만 길러 보자”는 거다. 나도 딸이 울고 불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애처로워 승락했고 결국 ‘꺼벙이’는 10여 년을 우리 가족과 함께 살게 된다.

 딸은 지극 정성으로 똥오줌, 먹이 주기, 목욕, 산책을 도맡아 했고 꺼벙이는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다. 하물며 잠을 잘 때도 침대에서 끼고 잘 정도였다. 꺼벙이는 아내와 아들과는 비교적 사이가 좋았는데, 유독 나와는 사이가 안 좋았다. 자기를 처음 데리고 온 날, 내가 펄쩍 뛰면서 반대한 것을 함께 사는 내내 기억하는 듯했다. 몇 달이 지나서 안 것이지만, 꺼벙이는 베지테리언이어서 채식 사료만 먹었고 아토피성 피부염이 있어서 냄새가 심했다. 만약 내가 이 사실을 알면 트집 잡아 강아지를 돌려보낼까 싶어, 딸과 아내가 숨긴 것이다.

 성격도 까탈스러워 작은 소리에도 신경질적으로 짖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 손님들이 올 경우는 미리 꺼벙이를 방에 가두어야 만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면 딸과 나는 자주 다퉜고, 서로 속이 상했다. 몸에 장애가 있어 민감한 것으로만 알았던 꺼벙이는 사실 정신적 장애도 있었다. 동물병원 닥터에게 “자주 신경질적으로 짖는다”고 하니까, 그런 증상은 “어렸을 때 구박을 받거나 상처 받은 기억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 주인에게 “혹시 그런 일이 있었냐”라고 물으니, “자기네도 그 전 주인에게서 가져올 때 비슷한 사연을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상처를 준 사람이 중년의 남자였다는 것도 알아냈다. 그 뒤부터 나는 속으로 ‘저 놈이 그 상처 받은 사람을 나라고 생각하는구나’ 하는 짐작을 했다. 

 세월이 지나 딸이 교환 학생으로 한국을 몇 번 다녀오는데, 그때마다 꺼벙이 돌보기는 아내의 몫이었다. 그러다가 몇 년 후, 딸이 아예 한국으로 결혼을 해 가버린다. 딸이 없어지자, 꺼벙이는 배지테리언, 아토피성 피부염, 예민성 신경 질환에다가 심한 우울증까지 걸린다.

 강아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아내가 아무리 잘해주어도 딸만큼 하겠나” 싶어 나도 안타까웠다. 더 큰 문제는 아내가 오랫동안 한국을 다녀올 경우였다. 아들마저 대학 다니느라 워털루에 가 있었기에 집에는 꺼벙이와 나만 있는 경우가 많았다. 피부염이 심해 약도 발라줘야 하고 산책도 시켜야 했는데 그때마다 도망가거나, 으르렁거렸다. 냄새도 심해 목욕도 2주일마다 시켜줘야 하는데 걱정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들이 2주일에 한 번씩 집으로 와, 약을 발라 주고 산책과 목욕을 시켜야만 했다. 그런 과정은 한국에 외손녀가 생기면서 더욱 잦아진다.

 

 꺼벙이가 죽은 날은 토요일이다. 아마 우리가 키운 지 10여 년쯤 되었으니, 사람으로 치면 80세쯤 된 나이였기에 늙고 힘이 없었다. 아내는 다음날 한국에 가야 돼 짐을 싸며, “꺼벙이가 내가 없는 동안 어떻게 지내지?”하는 걱정을 했다. 꺼방이도 오래 함께 살다 보니 눈치를 챈 듯, 그날따라 불안해 보였다. 그러던 중 우리 집 밖을 산책하던 어떤 강아지의 소리를 듣더니 목이 터져라 짖어대기 시작했다. 한 10여 분간을 짖어대어 아내가 “저러다 숨 넘어가겠네” 했는데 말이 씨가 됐는지, 갑자기 쌕쌕거리며 숨도 못 쉬고 소리도 지르지 못하는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이었지만, 눈동자와 온 몸으로 고통을 토해내었다. 마침 연휴의 토요일이어서 동물병원도 일찍 문을 닫은 상태였다. 여러 곳에 연락을 하고 부산을 떤 후, 가까스로 오후 늦게 병원에 갔다. 거의 다 죽어가던 꺼벙이가 산소호흡기를 부착해주니 신기하게도 의식을 찾았다. 의사 선생은 “지금은 의식을 다시 찾았지만,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며 아쉽겠지만 그만 보내 주라는 것이다. 입원을 시켜 생명 연장을 할 수도 있지만, 몇 주 정도 의식 없이 숨만 붙어있는 상태일 테니 의미가 없다는 의견이다.

 병원 밖을 나온 아내와 아들, 나는 아무 말없이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긴 침묵 끝에, 아들이 눈물을 흘리며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며 먼저 입을 뗐다. 아내는 다음날 한국으로, 아들은 마침 엄마를 배웅하러 온 것이라 학교로 돌아가야 하고, 나 또한 앞으로 혼자 가게를 봐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너무 슬프고 힘든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와 나는 선친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게 슬피 운 적이 없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해가 완전히 떨어진 뒤에나 우리는 꺼벙이를 보냈다.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서 성조가를 불러 세계의 주목을 받은 레디 가가(Lady Gaga)가 이번엔 자신의 반려견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영화 촬영으로 파리에 가 있는 동안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에 두고 간, 두 프렌치 불도그(French bulldogs), 코지(Koji)와 구스타프(Gustav)가 총까지 들고 위협을 한 괴한들 한테 납치된 것이다. “납치당한 반려견 행방을 아는 사람한테 불문곡직하고 50만 달러를 주겠다”고 선언했다는데, 이를 두고 호사가들이 입방정을 떤다. “입맛 다실 정도의 금액이 아니니, 통 크게 200만 달러쯤은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 됐던 다행히 두 마리 모두 무사히 돌아왔지만, 돌아오는 과정이 미스터리투성이어서 앞으로 유사 모방 범죄가 많아질까 염려된다. 레이디 가가의 반려견 생환 기사를 보며 무지개다리를 건넌 ‘꺼벙이’가 생각났다. “꺼벙아! 아저씨도 너 좋아했는데, 잘 안되더라.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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