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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숙
문협회원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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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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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5
“여기 없습니다(He is not here)”

 

“그는 여기 없습니다.” 건물 이름이 생소하게 튀어 올랐다. 일상의 무료함이나 존재의식의 무기력을 막으려는 막연한 시도에 번갯불이 번쩍하였다. 나이아가라 파크웨이를 달리다 포트 ‘이리’ 근처에서 만난 평범한 선술집 이름이었다.

약간 떨어져 높은 지대엔 역사적 건물임을 표시하는 철제 안내판을 세우고 빨간 벽돌의 ‘세인 폴’ 교회가 고풍스럽게 서 있었다. 언뜻 부활하신 예수를 찾은 마리아에게 천사가 전한 말 ‘그는 여기 없습니다.’가 떠올랐다. 당신이 찾는 예수는 여기 없으니 교회에 가보시오. 라는 안내문인가? 하지만 까만 목조의 단층 선술집은 종교적인 암시만 주는 것 같지 않은 여러 상념 들을 불러왔다.

그는 누구며 누가 누구를 찾으러 다니는 것일까? 찾는 대상이 궁금해졌다. 주인은 찾으러 온 사람도 찾으려는 사람도 잘 알뿐더러 왜 찾아 다니는 처지가 되었는지도 밝히 알 듯하였다. 설마 마누라 몰래 어디 간 건 아니겠지. 잠깐 미소가 떠올랐다.

이상을 찾아 꿈을 따라 한국을 떠난 지 어언 반세기가 되었다. 고국을 떠난 지 18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방문을 하게 되었다. 아현동 마루턱 축대 위에 세운 노란 벽돌 이층집은 주인만 바뀐 채 그대로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축대 밑까지 늘어진 라일락 향기가 더욱 반갑게 온몸을 끌어안았다. 드르륵 현관문을 열면 어머니가 반갑게 뛰어나오실 것만 같은 집. 아무것도 변한 것 없는 남의 집을 둘러친 블록 담을 손바닥으로 쓸며 돌고 또 돌았다.

한국에 오래 머물게 된 어느 날, 특별히 시간을 내어 어릴 적 옛집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남편의 집이 있었던 공덕동까지 옛날 초등학교 시절로 다시 돌아가 그때의 동선(動線)을 따라보기로 하였다.

집에서 언덕길을 한참 내려와 학교까지 걸어가고, 학교 옆 개천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교문에 들어서면 바로 넓은 운동장, 높은 축대 계단 위에 세워진 빨간 벽돌 이층 학교 건물, 왼쪽 언덕길을 달려 교실에 들어가던 아이들 무리에 단발머리 내 모습이 환히 떠올랐다.

주일에 교회에 가려면, 골목길 어느 집, 내 키 보다 훨씬 높은 축대 위, 베란다에 내놓은 화분의 꽃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저절로 ‘참 아름다워라’ 노래를 부르고 싶어졌었다. 이름 모를 그 꽃들은 지금도 내 망막에서 화려하게 웃는 듯하다.

그런데 이날 우리는 높이와 거리는 나이에 역 비례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토끼뜀을 깡충거리던 언덕길은 한 블록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이고 화분이 놓였던 축대는 내 허리 높이였다. 아플 때면 일꾼이 업고 다녔다는 남편의 등굣길은 채 5분도 안 걸리는 포장도로가 되어 있었다. 세월 따라 자라는 것은 사람의 외면뿐일까.

몇 년 전, 한국방문 때였다. 옛 동네에서 내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재개발, 신축 빌딩의 숲은 고층 건물이 하늘을 가릴 지경이어서 동서남북을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학교와 파출소를 중심으로 운동장 한복판에 서서 사면을 바라보았으나 복개공사를 한 개천은 자취를 감추고 주변엔 주상복합콘도가 줄지어 서 있었다. 넓어진 골목길은 포장이 되어서 바둑판처럼 그어진 도면엔 생소한 길 이름들이 붙어 있었다. 미로를 뱅글뱅글 돌다가 지쳐버렸다.

“그는 여기 없습니다.” 강변 의자에 앉아 다시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저 간판은 나에게 주는 쪽 편지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생애 내가 미국과 캐나다에서 찾으려 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아현동 옛집에서 다시 찾으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고향 상실자, 유년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나는 아직도 이곳 저곳 기웃거리며 그를 찾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디 가서 그를 만날까. 땅 위에는 없는 곳, 유토피아를 찾아 헤매는 것은 아닌지. “그는 여기 있습니다.” 라는 말을 듣고 싶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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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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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7
1812년 미 영 전쟁의 교훈

 

 1812년 미 영 전쟁 중 제 2린컨 연대에서 복무한 삼형제 군인 레오나드 하니(Leonard Haney), 마튜 하니(Matthew Haney), 제임스 하니(James Haney)의 참전용사인증 현판식이 인근 펠함(Pelham)의 한 묘지에서 거행되었다. 200여 년 전의 기록을 찾아 묘지의 주인공을 밝혀낸 사람은 4800Km나 떨어진 알라스카에 사는 고손녀 바바라 하니(B. Haney)다.

 200여 년 전 병사들의 묘를 찾아 참전용사인증현판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군악대와 군기의 사열식을 동원하고 시장으로부터 군의 장성, 이른바 전 동네 유지들과 주민이 다 나와 예식을 치르는 행사가 어찌나 엄숙한지 그저 경이롭기만 하였다.

 삼형제의 종군이유는 단순히 생업이 위태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전쟁에서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 이전에 삶의 터전을 짓밟히는 위기를 구하기 위해 17, 18, 19세의 어린 나이로 군에 입대한 것이다. 그들이 남겼다는 입대 동기는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였다.

 1812년 6월 18일에 미국(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이 영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서 발발한 미 영 전쟁은 1814년 12월 24일 미국과 영국 두 나라에 명분도 이익도 아무 성과없이 ‘겐트조약’으로 끝이 났다. 1812년 미 영 전쟁의 전선은 크게 오대호지역과 캐나다전선, 대서양전선(메릴랜드), 남부전선(뉴올리언스)이었다.

캐나다지역전선은 거의 모든 영토가 이미 인디언들의 영토였으나 영국과 미국 양 진영의 경쟁에 휘말려 인디언들이 처참히 학살되는 전장이 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미 영 두 진영에서는 서로 자기네가 사상자를 적게 내고 승리하였다고 외쳤지만 그 사이에서 죽은 병사는 다 인디언이었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진다.

미국이 노린 것은 무역봉쇄해제와 영국의 지원을 받는 인디언과의 분쟁을 종식시켜 서부개척을 쉽게 하는 것이었으며 영국령 캐나다의 장악이었다. 미국은 이리 호, 온타리오 호수를 장악하고 ‘어퍼 캐나다’의 제압에 성공하였으나 세인트로렌스 강의 수운(水運)을 통제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몬트리올, 퀘벡의 공략은 실패하여 ‘로워 캐나다’의 제압은 이루지 못했다.

캐나다전선은 용맹을 떨치던 쇼니 인디언추장 ‘테쿰세’와 ‘아이자크 부록’ 장군이 전사한 유명한 전쟁이다. 볼티모어의 치열한 대서양전선에서는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이 전소되고 해안에 퍼붓는 함포사격의 불꽃이 캄캄한 밤하늘에 쏟아져 내리는 별과 같다고 읊은 미국국가 Stars and Stripe의 탄생을 가져왔다.

남부전선 뉴올리언스 전투에서는 적은 군사력으로 우세한 영국 해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앤드류 잭슨 장군이 후에 미국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명성을 얻게 하였다.

미 영 전쟁은 로키산맥을 기준으로 캐나다 국경선을 확정하여 오늘의 지형으로 자리잡게 하였으며, 캐나다에 대한 미국의 야심은 좌절 되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여느 다른 전쟁보다 더욱 마음 아프게 하는 사실, 곧 영토회복에 나섰던 아메리카원주민 인디언이 가장 많이 희생된 것이다.

영국은 인디언중립국가의 건설을 약속하고 ‘테쿰세’와 동맹을 맺어 여러 전투에서 영국에 승리를 가져다 주었으나 겐트조약 이후 지켜지지 않았다. ‘테쿰세’의 전사로 인해 삶의 터전마저 빼앗긴 인디언들의 현실은 지금도 그들이 부르짖는 권리투쟁에서 열을 뿜는다.

‘앤드류 잭슨’은 대통령이 되자 우호관계를 맺어오던 인디언 주요 부족들을 계획적으로 미시시피 서부의 보호구역으로 쫓아냈다. 그들 중에는 강요된 추방을 당한 동맹군 체로키족도 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아버지가 아끼는 벚꽃나무를 자기가 베었다고 정직하게 말하는 ‘정직한 토마스’의 일화는 초등학교시절 모든 어린이들의 독본적인 교훈이었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토마스)이 대통령이 되기 전 장군으로서의 행적은 동심을 무참하게 짓밟힌 듯 모멸감마저 들게 한다.

그는 이로쿼이족의 몰살을 지휘하고 그들의 마을을 철저하게 파괴함으로 이로쿼이 족들은 그를 ‘마을파괴자’라 두려워하였다. 이로쿼이족이 영국군과 동맹을 맺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워싱턴은 죽인 이로쿼이족의 껍질을 벗겨 군장을 장식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미 영 전쟁 발발 1주일 후에 6.25사변이 있었다는 것을 새롭게 묵상한다. 육이오사변으로 세계16개국에서 유엔군이 참전하여 미군 2만여 명, 영국군 9백여 명, 캐나다군 516명이 전사하였다는 기록이다. 생업에 위기를 느껴 구원하려고 선택한 참전도 아니며 내 나라의 국익을 위한 전쟁도 아니었다. 순수한 인류 사랑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귀한 목숨을 바친 그들 전몰장병들의 뜻이 더욱 고귀하고 감사할 뿐이다. 영원히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으며 우정에 소홀해서도 안 될 것이다.

아울러 이 땅에 이민자로 사는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될 일이 있다. 그것은 이 땅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 흘리며 죽어 갔는가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살아갈 수 있는 땅이 아니라는 걸 역사가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지혜롭게 주인의식을 진작시켜야 될 교훈이 여기에 있다.

 

 *겐트조약(Treaty of Ghent): 미 영 간의 휴전조약으로 1914년 12월 24일. 벨기에 겐트에서 체결함. 미 영 양국의 모든 것을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으로 양 측의 영토손실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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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7
사랑스런 기억의 공유(共有)

 

5월은 나의 달이다. 어린이날, 어머니날, 스승의 날 그리고 내 생일이 있다.

토론토에 있는 딸의 축하 꽃은 어제 속달로 도착하였고, 아침 일찍 걸려 온 큰 아들 ‘영’의 전화는 한시에 주문음식이 배달될 것이라 하였다.

자택대기령으로 꼼짝 못하는데다 막바지에 이른 ‘코로나’와의 전투에 약간은 지쳐가던 터라 선득하니 신선한 생수줄기가 정수리로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가족 공동 이메일 창에 작은 아들 ‘현’의 메일이 올랐다. 제목은 '틴 베어와 P. J'. P. J는 Pajama boy로 둘 다 속을 넣은 봉제 장난감이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 되었다.

“오래 전 런던에서 ‘존’과 한방을 썼습니다. 틴 베어하고 P J가 있었는데 어찌나 심하게 던지고 치고 놀았는지 머리는 거의 떨어져서 건들거리고 팔 다리도 터져서 내 버려야 할 처참한 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터진 곳을 꿰매고 박음질하여 깨끗이 수선하여 알록달록한 주머니에 담아 침대 머리기둥에 걸어놓은 틴 과 P J 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격하고 기뻤는지요. 우리 네 아이들과 할머니까지 더구나 직장에 다니면서 그 바쁜 중에 어머니는 그걸 버리지 않고 정성 들여 다듬어서 침대머리에 걸어주신 것입니다.

형은 결혼하고 동생들은 공부하느라 다 집을 떠나고 혼자 있게 되었습니다. 텅 빈 집에 혼자 남으니 형과 동생들 생각이 나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존’ 침대머리에 걸린 틴과 P J를 보면서 외로움을 달랬습니다. 그 후, 저마저 떠나고 런던 집을 이사하게 되어 그들과 헤어지게 된 후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틴과 P J를 정성껏 고쳐주신 그 사랑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였습니다.” 자루 속에 담긴 눈이 커다란 틴 베어와 P J를 스케치한 밑그림으로 편지 끝을 맺었다.

틴과 P J. 그들이 어디에 갔는지 까맣게 잊고 지냈다. 이사하면서 많은 것을 버리고 왔지만 버린 기억도 가지고 온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단지 이들이 꽤 오랫동안 아이들과 함께 있었던 것은 확실하였다. 결혼으로, 수련의로 그리고 법학공부로 집을 떠난 집안은 매일 아침 요란스럽던 참새소리마저 울음을 멈춘 듯, 고요하고 무색무미한 대기가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혼자 남은 아들도 쓸쓸한 속앓이를 하고 있었음이 새삼 눈물겨웠다. “현아. 형과 동생들이 떠난 빈 방, 빈 침대가 참 외로웠지? 엄마와 아빠도 쿵쾅거리는 너희들 발소리,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단다. 하지만 네가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던지. 참 고마웠어.”

 

 

잠시 후, ‘영’의 메일이 올라왔다. ‘틴 베어와 P J의 최근 모습.’ 이층으로 오르는 층계에 떡 버티고 서서 잔뜩 뽐내고 있는 틴과 P J라고 하였다. 깜짝 놀랐다. 이 장난감이 어떻게 해서 ‘영’의 손에 들어가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동생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형이 챙겼다는 것이 얼마나 기특한지 눈물이 폭 솟았다.

동시에 또 다른 영상이 언뜻 스쳤다. 오래 전 사진첩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빛바랜 폴라로이드사진 한 장을 찾아 복사하여 아이들에게 띄웠다. 모두들 환성을 질렀다. 소리의 강약으로 컴퓨터가 작동을 한다면 아마도 대 여섯 개의 컴퓨터가 열을 뿜었을 것이다. 그 사진은 우리가 미국에 도착하던 해, ‘영’의 생일, ‘현’이 태어난 해, 크리스마스기념으로 미국에서 처음으로 사준 테디 베어였다.

응접실의자에 색동한복차림의 ‘영’에게 비스듬히 기대어 ‘현’이 앉아있고 의자등받이에 걸터앉아 있는 테디 베어가 보였다. 더 포동하고 풍성한 털에 크고 둥근 눈이 두 아이들 경호병처럼 지키고 있는 사진이다. 자라는 동안 수없이 많은 장난감을 부수고 버렸지만 테디 베어는 ‘영’의 단짝이었다.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되어 아이들에게 자기 물건은 전부 직접 정리하라고 메일을 보냈었다. 오타와, 킹스턴, 토론토 등 멀리 있는 동생들의 물건을 맏형이 챙겨준 것이었다.

그런데 한시에 배달 해준다던 음식이 30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차로도 20, 30분 걸리는 거리인데 배달을 해준다는 사실이 놀랍다. 코로나의 위력이 사람들을 오히려 더 지혜롭게 기술적으로 난관을 극복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하였나 보다.

배달이 왔는지 ‘영’의 문의 전화가 있고 다시 10여분 후에야 딩동. 드디어 배달이 왔다. 주소를 틀리게 쓴 때문이라며 거듭 사과하고 돌아간 후 자초지종을 설명한 ‘영’의 메일이 왔다.

우리가 음식을 잘 받았는지 모르겠다고 전해준 사람은 친절한 우리이웃이라고 하였다. 집을 찾는 중에 누군가가 우리가 닥터 송의 부모란 것을 알고 ‘영’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수인사나 할 정도로 동네 교류가 적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이웃들은 우리를 잘 알고 서로 도와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따뜻한 연대감을 일으켜 주었다.

작가 ‘게리 주커브’는 지구상 수십억 영혼 중에서 내 인생의 일부분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모두 내면에서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일깨워 줄 수 있다고 하였다. 미지근해진 음식을 먹으며 사랑의 기억을 공유하다 흔적을 남기고 간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임을 깊이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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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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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6
돌미나리

 

영화 ‘미나리’의 윤여정씨가 오스카 여우 조연상을 수상하였다. 젊은 한인 가정의 미국 정착기를 소재로 딸을 도와주려고 언어, 생활풍습이 전혀 다른 이국땅에 날아온 한국전형 할머니 순자의 역을 깊이 있게 연출하였다는 평이었다.

‘미나리’ 이름이 오스카 후보에 오르면서 나름대로 미나리와 얽힌 나만의 오랜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나리는 다년생으로 주로 물가, 습기 있는 곳(미나리 꽝)에서 자라며 한국에는 80여 종이 있고 강활, 기름나물, 어수리, 바다나물 등의 이름이 있다.

미나리는 몸속의 노폐물과 독소 등을 제거, 염증을 완화 시키고 청 혈, 해독, 강장제, 결막염, 간염, 감기, 고혈압, 과민성 대장증후군 등의 예방 치료에 효능이 있다고 한다.

항산화 작용을 함으로 위장암, 대장암, 전립선암 등의 암 예방에 효과가 있으며 비타민 A가 풍부해 눈의 피로를 풀어주고 시력을 보호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1.4후퇴 당시 아버지와 오빠만 먼저 피난시키고 집을 지키던 어머니와 우리 자매들은 마지막 서울 철수령에 밀려 걸어서 피난을 가게 되었다. 한 달 만에 우리가 정착한 곳은 전북 이리(현 정읍) 근처의 ‘황 등’이라는 농촌 마을 장로님 댁 사랑채였다.

5일 장에서는 쌀밖에 살 것이 없을 정도로 푸성귀, 계란, 때로 두부까지 서로 나누는 인심 좋은 자급자족 마을이었다. 어느 더운 날, 권사님이 작은 오지항아리를 들고 오셨다. 열자마자 상큼한 냄새가 싸 하게 코를 찔렀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하게 자른 미나리에 풋고추를 성둥 성둥 썰어 담근 물김치는 이미 발효되어 새큼한 맛이 들어가고 있었다.

보리를 약간 섞은 그 날의 저녁밥은 김치 한 보시기로 포식하였다. 더운 날씨에 찐득하게 솟았던 땀이 순식간에 걷히는 듯 온몸이 뼈 속까지 시원하였다. 이것이 내가 처음 ‘미나리’와 만난 즐거운 해후였다. 이웃들은 매일 이다시피 미나리와 상추를 갖다 주었고 나는 서울 환도할 때까지 물리지도 않고 미나리를 먹었다.

대학교 신입생이던 여름방학에 농촌계몽을 가게 되었다. 정부수립기념으로 특별히 계획된 농촌계몽은 제주도 포함 전국 10개 지역에 서울대, 연세의대, 성균관대, 숙대 등에서 학생들을 선발하여 각 팀에 수의과, 농과, 의과, 교육과, 경제과, 가정과 학생 1명씩으로 편성하였다. 약 50, 60명의 학생들이 수원에 있는 농업진흥원에서 일주일간의 합숙 훈련을 받고 지정마을로 떠나 한 달간 계몽 사업을 한 것이었다.

무료진료사업은 다 같이 하였으나 남학생들은 논이나 밭에 직접 들어가서 과학적인 농사법 조언을 하기도 하고, 가축의 건강이나 사육에 대한 계몽을 하였다. 나는 부인들을 모아 영양소의 이해와 조리법에 대해 강의와 실습을 하고 주방위생과 과학적인 동선(動線), 어머니의 건강관리 등을 교육하였다.

한 주일에 며칠은 아동들에게 글짓기, 그림 그리기, 새 노래 부르기를 지도하였는데, 아이들은 한 달 내내 눈만 뜨면 나를 찾아와 종일 따라다녔다.

하루는 장난스러운 농과학생이 다리에 피를 줄줄 흘리며 들어왔다. 밭에서 일하다 왔다는데 다리엔 거뭇거뭇한 상처가 여럿 나 있었다. 깜짝 놀라 어디서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더 놀라웠다. 미나리꽝에 들어갔는데 순식간에 거머리가 떼로 들러붙었다고 한다.

손으로 잡아 뜯었지만 얼마나 억센지 잘 떨어지지도 않고 이미 피를 빨아서 줄줄 흐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거뭇거뭇한 것은 상처가 아니라 아직도 달라붙어 있는 거머리였다. ‘미스 손 보여주려 그냥 왔지’라며 싱긋 웃었다. 그 순간 나는 미나리와 작별을 하였다.

 몇 년 전에 원예가 H씨가 이사를 하면서 자기 집 뜰에 있던 포도나무를 옮겨 주었다. 텃밭에 번식한 부추와 미나리도 옮겨 주겠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 반대하였다.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서 피를 빨던 거머리는 아직도 온몸에 소름이 돋치게 하였다.

‘이건 돌미나리라서 괜찮아요.’ 하긴 미나리꽝이 아니고 밭에서 나는 것이니 다른 종류일 수도 있겠다 싶어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이 돌미나리가 번식하여 수많은 한국인이 신나게 따 간다. 고향 생각에도 좋고, 몸에 좋고, 맛도 좋고 ‘좋다’를 연발하며 따가는 모습이 나 보기에도 좋다.

어쩌면 돌미나리는 우리 이민자 모두의 일생을 보여주는 삶의 이정표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나리의 효능을 알지도 못하던 때, 먹는다는 사실을 순수하게 즐길 수 있게 해주던 미나리는 거머리가 달라붙어 피를 빠는 난관과 고통의 투쟁기를 거쳐 드디어 돌미나리로 탈바꿈하고 새 세상, 새 환경에 적응하여 당당히 주인으로 우뚝 서는 우여곡절의 승리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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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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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2
별 아래 들리던 목탁소리

 

 자택 대기령이 내렸다. 팬데믹에 묶인 지 벌써 2년째로 접어든다. 마스크 쓰고, 사회적 거리를 두고, 손을 깨끗이 씻고. 방역수칙은 이제 습관화되었건만 2차 3차 럭다운 선포는 더 큰 공포와 불안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에 먹칠을 한다. 앞을 분별할 수 없이 캄캄하던 그 밤이 슬며시 펼쳐진다.

 그것은 순진한 것이 아니라 무지한 연고였다. 버스정류장에서 산길로 조금 오르노라면 오른쪽으로 굴다리가 나오고, 거기서 암자까지는 반시간, 넉넉히 한 시간 정도면 도달 할 수 있다고 들었다.

12시경에 출발하였으니 천천히 걸어도 2시경이면 암자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걸어갔다. 그런데 반시간 정도 지나면서 노랫소리가 잦아들며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떠날 때는 맑게 갠 하늘이었는데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산속은 차츰 어두워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캄캄한 밤이 되었다.

반시간 정도 걸으면 나온다던 굴다리도 나오지 않았다. 사람이 다니지 않은 산길은 잡목과 수풀에 엉겨서 길도 찾을 수 없었다. ‘조금 더’ 무조건 위로만 향해 산길을 오르게 되었다.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고 손에 든 가방들은 천근같이 무거워졌다.

 대학교에 신입한 나와 의대 본과에 진학한 사촌언니가 축하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리더는 E여학교 선배이자 언니의 먼 친척 되는 S언니였다. 목적지는 남해 소금강산. 리더가 6.25사변 때 잠시 피난생활을 하던 곳이라 했다. 벼르기만 하다 끝내 올라가보지 못한 명산에 꼭 가보고 싶은 것이 마음속 깊은 의도였다.

학교와 집 밖에 모르던 여자 셋이 집을 떠나 먼 여행길에 나선 것은 성취감에 도취된 만용 때문일 것이었다. 학생시절 승마부에서 명성을 떨쳤다는 리더는 자신만만하여 앞장서고 우리는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여수에서 나룻배를 타고 남해로 건너갔다가 돌아올 때는 다시 배로 부산까지 가서 쉬고 이틀 후에 서울로 귀가 한다는 마스터 플랜 외에 지명이나 세세한 일정을 모르는 것은 전적으로 리더에게 일임한 때문이었다.

길은 점점 험해져서 손을 잡아끌어 주어야만 오를 수 있는 돌 작 길이 되었다.

언니의 커다란 트렁크는 셋이 힘을 합해야만 들 수 있고 몸마저 짐짝처럼 끌어야 할 지경이 되었다.

무조건 위로만 사력을 다해 오르던 우리 앞에 마침내 공터가 나타났다. 소나무가 둥그렇게 둘러선 반반한 풀밭위로 찬바람이 몰아치고 새파란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게 빛나고 있었다.

 흠뻑 젖었던 온몸이 이번엔 추위로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었다. 산정에만 오르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이제는 어디로 가야 될지 실망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온 몸의 물기는 전부 땀으로 빠져 나간 듯 탈진되고 머릿속은 무감각의 텅 빈 공동이었다. 엉엉 언니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언 듯, 바람결 따라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딱. 딱. 따닥. 또그르르 목탁소리였다.

‘여보세요. 암자가 어디 있어요.’ 우리에 갇힌 사자처럼 공터를 돌아가며 소리소리 질렀다.

그러나 산정에서 지르는 소리는 위로만 떠돈다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우리는 소리 나는 곳을 향해 산길을 내리 달렸다. 길을 찾아 내려온 것이 아니라 소리 나는 방향을 향해 트렁크는 던지고 잡아끌고, 사람은 구르고 넘어지고, 나뭇가지에 긁히고 찔리면서 무작정 달린 것이었다.

자루처럼 툭툭 떨어진 곳은 작은 절간 뒷마당이었고 쪽마루까지 기어가서 털석 털석 주저앉았다. 건넌방 법당에서 불경을 외는 소리,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안방 미닫이문이 주삣 주삣 열리다가 마루 끝에 세 여자를 보더니 후다닥 도로 닫혔다. ‘여보세요. 산에서 길을 잃었어요.’ 순간 목탁소리가 멎고 안방문도 다시 획 열렸다. 안방에선 남학생이 어머니와 함께 뛰어나왔다. 부리나케 부엌으로 내려가 밥상을 차리고 군불을 지피느라 분주하였다.

대나무대롱으로 산골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뒤꼍으로 나가 얼음같이 찬 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썼다. 시간을 물으니 새벽 3시라고 하였다. 세상에, 15시간을 산속에서 헤맨 것이었다.

아직도 산엔 위험한 짐승이 돌아다니는데 여자 셋이 상하지 않은 것은 기적이라 하였다. 내년도 대학입시 수험생이라는 남학생은 내 가슴에 서울대학교 배지를 보더니 자기의 목표요 기도의 응답이라고 반색하며 좋아하였다.

바닷가 산속은 해가 빨리 지고 밤이 속히 온다는 것, 높은 산은 안개가 띠처럼 두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내가 남학생의 기도의 응답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히 전능자의 손길이 나를 보호해 주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내 인생길에서는 절대로 남의 말만 의지하고 목적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는 투철한 신념은 그때부터 생겼다.

오늘 초강도 팬데믹 위협의 소용돌이에서 그 밤을 떠올리니 새로운 용기와 투지가 솟구친다. 필사의 힘을 다하면 ‘하늘은 언제나 선(善)의 편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남해의 소금강산은 나를 지혜롭게 만들어 준 아름다운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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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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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1
대한의 아들 딸

 

아침신문을 읽다가 두 기고문에서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요양원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 제하에 한인사회의 열망인 무궁화 요양원이 2008년부터 오늘 다시 우리 손에 넘어 올 수 있는 문턱에 이르기까지 위기 때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 회생시킨 윤정림, 정창헌, 신중화, 강대하, 네 분의 선견과 결단이 사진과 함께 소개되었다.

유동환 무궁화 인수추진위 공동모금위원장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다. 참으로 하늘에 닿은 우리의 절실한 간구는 타인의 입에 물린 음식마저도 꺼내주는 기적을 이루게 한 것이다.

토론토 스카보로의 한 양로원에서 43명의 코로나 집단사망자가 발생하자 노인들의 건강과 안전대책수립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미카엘 올 시니’교수(오타와 대)와 ‘지한 아바스’교수(라이어슨 대)는 코로나로 죽은 사람은 이미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이라는 새로운 표현을 사용하였다. 사회적 죽음이란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인간적인 가치가 없다고 간주되는 사람을 뜻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타인이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의사를 대등하게 교류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오늘 날 캐나다 인구의 예상 기대수명은 82세로 전체인구의 17퍼센트에 달한다고 한다. 2041년에는 25퍼센트에 달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80대 줄에 들게 된다고 예고하였다.

‘돈 드라몬드’교수와 ‘던칸 신클레어’는 급격히 고령화 되어가는 사회에 “잘 늙어가기” 위해서는 건강뿐만 아니라 주거지, 생활습관, 그리고 사회적 필요를 잘 조화시켜 개선해야 된다고 하였다.

무궁화 요양원 되찾기 모금희망액수는 400여만 달러, 현재 200여만 달러가 모였다고 한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어르신들을 한국음식을 대접하며 한국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한국말로 주고받으며 즐겁고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우리의 양로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추진위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 제2, 제3의 한인요양원을 세울 원대한 꿈을 피력하였다. ‘일본의 자산, 우리의 걸림돌’ 제하의 권정희 LA한국일보 논설위원은 “위안부는 계약으로 맺어진 매춘부”라는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해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하버드 로스쿨의 미쓰비시 일본법학 교수 ‘마크 램지어’에 대하여 썼다. 그는 2018년 일본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을 정도로 일본과 친밀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일본은 1972년 외무성소관으로 설립된 재팬파운데션(일본국제교류기금)을 통하여, 중국은 공자연구를 앞세워 무섭게 세계를 파고들고 있다는 역사적 실증이었다.

경제적으로 부강해진 일본은 국제문화교류 사업을 통해 일본에 대한 이해와 국제 상호 이해를 증진하겠다는 취지로 학계의 기금과 학술지원금, 장학금을 뿌려 전 세계에 친 일본파의 브레인자산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역사의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금력에 매수된 추한 학자들을 보게 된 것이다.

순결과 정절을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조선여인들을 절망과 죽음의 길로 몰고 간 인간 이하의 만행을 감싸주는 학자의 양심이 가련할 지경이다. 그런 연구비를 받는 한국 학자도 있다니 말문이 막힌다. 외교적 문제로, 학문적 자유임을 들먹이며 민적거리는 상황에서 또박또박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여성학자 석지영(하버드법대)교수, 이진희(일리노이대)교수가 계신다는 건 환성을 지를 만큼 기쁜 일이다.

석 교수는 램지어 논문의 허점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이 교수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재일교포 차별을 정당화한 그의 논문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수정과정을 거치도록 학술지 측을 설득하였다고 한다. 절대로 사회적 죽음을 당할 수 없는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한국여인의 자존심을 만방에 설파한 쾌거이다.

나도 ‘램지어’에게 묻고 싶다. 위안부에 일본여인이 있었는가. 계약으로 맺어진 매춘부라면 계약은 누구와 한 것인가. 계약의 주체가 일본군대라면 일본이 매춘부를 고용한 매춘업소였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본이 국가 이미지 개선을 원한다면 과거의 악행을 금칠로 덮어 뭉개려고 할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피해국에 진심어린 사과를 하는 것이 우선순위일 것이다.

이제 몇 분밖에 안 남은 할머니께 반듯한 사과 한마디 받아줄 올곧은 위정자와 학문의 자유를 역으로 공격할 수 있는 지략가가 많이 나오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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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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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4
미스터 애국자

 

금년 들어 제일 추운 날, 어젯밤에 난방기가 고장이 났다. 어찌나 추운지 온몸은 잔뜩 웅크려 들고 두 주먹은 꽉 쥔 채 사시나무처럼 마구 떨었다. 수리를 마친 집안이 따뜻해지려면 몇 시간은 더 있어야 될 모양이다. 창가에 앉으니 나른한 상념이 몰려왔다. 집안에서 이 지경인데 홈리스들은 얼마나 추울까. 문득 그가 떠올랐다.

나이아가라 지역 문우들 몇이 매주 수요일 버거킹 햄버거 집에 모여 만남을 즐기던 때였다. 주인 ‘한’사장이 무한정 채워주는 커피에 두세 시간 한담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

우리의 지정석은 식당 끝 모퉁이에 둥글게 의자를 배치한 특별석이고 그는 늘 두 테이블 앞 창가에 자리잡고 앉았다. 한창 대화에 몰두하다가도 일제히 시선이 쏠릴 만치 그가 들어오는 방식은 특별났다.

타고 온 자전거를 바로 창가에 주차한 후 카키색 배낭을 메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들어섰다. 걸음걸이는 마치 박자에 맞추거나 걸음 수를 세면서 걷는 듯 군대식 구보로 뚜벅뚜벅 걸어와서 두발을 탁탁 한데 모으며 테이블 곁에 일단 멈추었다. 숱이 많지 않은 곱슬머리가 이마에 드리워지고 외양은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배낭의 왼쪽 옆에 캐나다 깃발을 달고 다니는 것이었다.

더욱 기이한 것은 의자 위에 배낭을 벗어놓은 후 남쪽을 향하여 차렷 자세로 힘차게 거수경례를 한 다음 다시 동쪽을 향하여 경례를 부치는 것이었다. 전시훈령을 받들거나 임전태세의 결의가 깃든 엄숙한 자세였다.

일련의 의식을 마치고 나면 카운터에 가서 주문을 하였다. 어디를 향하여 경례를 부치는지, 경례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홈리스(노숙자)라는 추측 외에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그를 ‘미스터 애국자’라고 불렀다.

추운 겨울 홈리스 애국자를 떠 올리니 오래전 여행 필름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S박사의 인솔로 중국 연변 조선족자치주 용정과 고구려유적 답사여행이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고주몽의 군사훈련장, 고구려건국비사 광개토대왕비를 보았다.

거대한 산 같은 장수왕 능과 그만큼 거대한 300여 개의 왕과 귀족, 장수의 도굴되고 허물어진 능 터, 용의 눈이나 발톱에 박은 보석들은 다 뽑아간 고구려 고총 고분벽화, 어린이 놀이터로 뭉개버린 국내성 성터, 가는 곳마다 고구려 문화말살정책이 뒹굴고 있는 폐허가 울분을 자아냈다.

그러나 더욱 심금을 찌른 것은 거의 평평해진 돌무덤이 길가에 수없이 널려있는 것이었다. 안내자의 설명으로는 그게 모두 이름 없는 독립지사들의 무덤이라고 하였다. 현재 연변 자치주에 거주하는 한족 중의 거의 전부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라고 하여도 틀림이 없다는 것이었다.

만 갈래의 물이 모여든다는 뜻의 도문강(두만강)과 구부러진 노송 하나 외로운 일송정, 물 건너 북한 땅을 바라보니 애국자들의 처절한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였다.

 팬데믹 제재가 시행되기 얼마 전 우연히 그 햄버거 집에서 미스터 애국자를 만났다. 그런데 자전거 없이 걸어서 들어오는 것이었다. 자신이 처분했는지 도난을 당했는지 자전거 없는 그가 측은해 보였다. 여전히 남쪽, 동쪽을 향하여 거수경례를 부쳤지만 조금 피곤한 모습이었다.

마침 손님도 많지 않아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햄버거는 내가 지불해도 괜찮을까요?’ ‘아니요. 저도 있어요.’ 아주 정중하게 사양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표정 밑에 깊이 새겨진 자존심을 보았다.

팬데믹으로 인해 모임이 제약되고 공공기관이 문을 닫게 되면서 나이아가라폭포 주변을 드라이브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무심히 지나치던 것들을 더 자세히 볼 수 있고 늘 시간에 쫓기 듯 서둘던 생각의 틀에 조금은 천천히 걷는 속도조절이 이루어지는 듯하였다.

버거킹 햄버거 앞길 룬디스레인(Lundy's Lane)을 남으로 조금 내려가면 커다란 아치형 철제조형물이 걸려 있다. 1814년 미영전쟁의 상징으로 시에서 만들어 놓은 기념물이다. 조형물이 설치된 언덕 위의 건물 앞에 붙은 팻말을 읽어보니 룬디스레인 전쟁기념관이라고 쓰여 있었다.

집에 돌아와 웹 서치를 해보다 깜짝 놀랐다. ‘미스터 애국자’가 경례를 부친 남쪽은 룬디스 장군의 이름을 딴 전쟁기념관과 그 위 철제 조형물의 싸우는 병사들이고 동쪽은 한 블록을 전부 차지한 드라몬드 전몰용사묘지였다.  

나이아가라 온 더 레이크의 ‘포트조오지’(Port George)를 시작으로 ‘퀸스턴하이츠 (Queenston Heights)’(브록장군 동상과 캐나다 역사박물관), ‘룬디스’, ‘치파와’, ‘포트 이리’까지 나이아가라 강 유역은 미국과 영국(캐나다) 사이에 1812년부터 1815년까지 3년간의 격전지였다.

수륙만리 캐나다에 살고 있는 이민자에게 애국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본다. 자신의 형편을 구차하게 여기지 않고 존재의식과 자존심을 지키면서 오로지 한국인, 캐나다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 나라있는 백성으로 만들어 준 병사들과 선열들께 늘 감사하는 마음과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자주와 독립은 결코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변 벌판 이름 없는 독립투사들의 무덤에 따뜻한 바람만 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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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8
신축년 설날

 

설날 아침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다.

지난 밤 내린 눈이 폭포에서 퍼진 물안개에 젖어 주변 초목은 온통 얼음 숲이었다.

구름이 쫓겨 가는 틈사이로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자 숲은 순식간에 수정같이 반짝였다. 팬데믹의 탈출구를 찾아 갈급하게 고대하던 신축년. 흰 소의 발걸음은 숨 막히게 느리고 답답하였다. “이러~, 이러~ 속히 오시 옵 소 예.”

 하루에 코로나 확진자가 3천 명에 이르고 사망자가 70여명에 육박하자 온타리오주 정부는 제2차 긴급사태를 선포하고 자택 대기령을 내렸다. 또 다시 묶인 몸, 갇힌 신세가 되었다.

사람을 대면하지 않고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드라이브였다. 이나마 중단하면 운전하는 법마저 잊는 것이 아닐까. 규칙적인 생활방식을 위해서라도 드라이브는 사수해야 할 마지막 보루 같았다. 처음 팬데믹 록다운 이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차를 몰고 나갔다.

40여년 살던 온타리오 런던을 떠나 나이아가라지역으로 이사를 하게 된 이유는 다분히 목가적분위기가 좋아서였다. 고국을 떠나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이 미국 뉴욕 주 버펄로, 나이아가라 블러바드, 폭포를 사이에 두고 바로 강 건너 마을이었다.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꽃이 지지 않는 곳, 딸기로부터 시작하여 블루베리, 체리, 자두, 복숭아, 배, 사과, 포도향이 열매 익는 순서대로 넘실대는 과수원 동네, 포도주의 집산지에다 나이아가라 단층지대를 끼고 꼬불꼬불 이어지는 언덕숲길 동네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그 중에도 들림 다리를 건너 20여분 달리면 눈앞에 펼쳐지는 폭포의 장관과 새파란 하늘에 뜨는 칠보 색 무지개가 자석처럼 끌었다.

남편이 즐기는 재담이 있다. “겨울이 되면 낫을 준비합니다. 날씨가 맑고 바람이 없는 날엔 폭포 위에 어김없이 무지개가 뜹니다. 갑자기 추워지면 무지개가 얼어버립니다. 낫으로 언 무지개를 턱턱 잘라서 냉동고에 보관하고 아무 때나 무지개를 즐길 수 있습니다. 또 나이아가라 강가엔 오리가 많습니다. 겨울에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서 물이 얼면 오리들이 얼어붙습니다. 낫으로 오리를 잘라서 냉동고에 보관하고 일 년 내내 오리구이를 해먹을 수 있습니다. 기적은 그 다음 해 잘린 오리다리에서 오리가 싹튼다는 것입니다. (진짜로 한 겨울 기록적 추위가 있던 날 포트 달하우지 다리 밑에 서식하던 오리가 얼어서 지역 소방대원들이 오리구하기 작전을 벌인 뉴스가 지방신문을 장식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이아가라폭포를 바라보면 점점 젊어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이야 가라!’ 이기 때문입니다.”

나이아가라폭포는 1678년 프랑스선교사 루이 헤네핀 신부가 온타리오 호수에서 천둥치는 폭포의 소리를 듣고 처음으로 발견하여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수억 년 전 생성기의 폭포는 지금보다 10km나 하류에 있었다 한다. 매년 1.4cm씩 침식을 한다니까 이사 온 후로 10여cm는 침식이 되어있을 것이다. 마스크에 검은 안경, 점퍼 후두까지 눌러쓰고 폭포 앞에 섰다.

나이아가라폭포공원은 한적하기 한이 없었다. 염소섬주변의 미국폭포나 말발굽폭포라 불리는 캐나다폭포도 맹렬하게 용트림하며 치솟다가 흰 거품을 내뿜으며 부서지고 있을 뿐이었다. 신이 노한 때문이라고 아름다운 처녀를 산 제물로 바쳤다는 슬픈 전설의 우렛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고 있었다. 시간과 계절에 따라, 방향에 따라 울리는 소리색이 다르다는 폭포에 귀가 먹먹하였다.

한순간이 지나자 요란한 소리는 간 곳 없고 윙~ 자자한 울림만이 상념의 침전물을 마음바닥에 수북이 가라앉혔다. 폭포소리는 온 몸과 마음의 진동으로 듣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일생을 뜻하는 한자 생(生)은 소(牛)가 외줄 타기(一)를 하는 것이라 한다.

문득 공중곡예사 닉 왈렌다(Nicholas Wallenda 미국인)가 떠오른다. 2012년 6월 저녁, 그는 미국과 캐나다 나이아가라폭포 위 550여 미터를 외줄 타기로 건너왔다. 양안을 가득 메운 구경꾼들의 환호성이 우렛소리를 잠재우던 열광의 도가니. 인내와 극기의 인간 승리였다. 소처럼 묵묵히 걷노라면 코로나는 반드시 극복될 것이다. 기필코 승리할 약속의 무지개가 구름 속에 가려있지 않은가. 폭포를 향해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나이야 가라! 코로나야 물러가라! 참 자유여 어서 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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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7
블랙 위크(Black Week)에 비치는 서광

 

12월 첫 주 동안에 세분의 부음이 있었다. 글벗 J의 어머님이 87세로 한국에서 돌아가셨다. 코로나사태로 귀국할 수가 없어 장례식에 조차 참석 못하는 상황이었다. 위로 할 바를 모르고 그저 안타까운 한숨만 나누고 있는 중에 교회의 원로장로님이 어제 밤에 돌아가셨다는 전갈이 왔다.

 

확정되는 대로 알려주겠다는 장례 일정과 절차를 기다리는 중에 또 하나의 부고가 날아 온 것이다. N박사님의 어머님이 토론토의 한 양로원에서 어제 아침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이날 신문의 코로나 현황보고에는 온타리오 주의 신규 확진 자는 1848명, 사망자는 45명이고 그 중 29명이 장기 요양원 환자라고 보고하였다. 죽음이라는 낱말이 뭉게뭉게 검은 연기를 뿜어대듯 슬픔과 절망으로 마음바닥을 캄캄하게 먹칠을 하였다.

 

81세의 원로 O장로님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할 만치 순박하고 인자한 분이었다. 교회창립주축교인으로 40여 년간 세분의 목사님을 거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에 참여하고 열성으로 교회를 섬겼다. 수년 전부터 당뇨 고혈압으로 자신의 건강도 좋지 않으면서 거동이 불편한 권사님을 부축하여 교회에 출석하며 극진히 보살폈다.

 

대면예배가 전교인 30% 제한으로 허용되던 지난 9월, 제일 먼저 참석하리라 기대한 장로님이 보이지 않았다. 나이가 80이 넘은 사람은 교회에 나오지 말고 집에 있는 것이 자신과 타인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해서 코로나사태가 전면해제 되는 날을 참고 기다리는 중이라고 하였다.

 

환자가 환자를 돌보며 사는 일상의 피로가 온몸에서 번져나는 듯 수척하고 후줄근한 모습이 안쓰러웠다.

 

92세 N박사의 어머니는 치매가 좀 있어 양로원에 계셨는데 건강이 급속도로 내리막을 달리며 가족과 주위 분들을 초조와 긴장으로 몰아갔다. 매주 토요일 면회를 가면 아들의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며 반가워하였다. 며느리가 먼저 들어가면 누구세요? 하다가도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저 누군지 아세요?’ 하면 ‘누군 누구야 우리 oo의 마누라 지’ 하며 알아보았다.

 

코로나 사태로 면회가 거의 금지되었다가 2차 제약이 풀리면서 간신히 허락되긴 했는데 매번 방역검사를 통과해야 하고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고작 10여분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면회허락을 받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번잡하여 마음대로 면회를 갈수도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근래에는 종일 눈을 감고 잠을 자는지 통 반응이 없는데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면 이불 위로 내민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면서 알은체를 하더라고 한다.

 

너무 신기해서 찍어왔다는 사진을 보니 젊어서는 기골이 장대한 여장부의 모습이었다. 식사도우미를 구할 수 없으니 직접 해 드리라는 전화가 와서 부인과 교대로 방역검사를 받고 하루 왕복4시간 거리를 매일 아침에 올라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하루는 N박사가 급히 만나자고 하였다. 병원에서 안락사 신청양식까지 보내 왔는데 어찌하면 좋을지 의견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안락사는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성인 환자가 동의 한다면 의사조력 자살을 허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안락사에는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존엄 사)가 있는데 적극적 안락사는 환자의 요청으로 극심한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약제 등을 사용하여 행해지는 반면에 소극적 안락사는 환자나 가족의 요청에 의해 약물이나 영양, 연명기구 등을 제거함으로써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을 말한다.

 

흔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소극적 안락사 즉 존엄사의 결정권으로 다분히 자녀와 가족들에게 지워지는 생명수탈의 윤리성이다. 존엄사 할 권리는 모든 사람에게 허용되었으나 이의 결정은 불완전한 타인의 조력으로 이루어진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스스로 앉지 못하고 밥을 먹지 못하는 처지가 되면 안락사를 허용한다는 유언을 미리 써 놓는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존엄사를 위해 의사와 자녀 가족들에게 어떤 의미로든 살인을 종용한다는 것은 일종의 무책임한 이기주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고칠 수 없는 병이라면 자연적으로도 떠날 날이 길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일생 동안 죄의식에 시달리기 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고별식에서 뵌 O장로님의 모습은 아주 평화롭고 화사하였다. 하관 식에는 거리두기 때문에 한자리에 모이지 못했지만 묘지를 빙 둘러쌀 정도로 많은 사람이 왔었다고 한다. 장례식에서 돌아온 N박사는 피곤한 중에도 중책을 완수한 편안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문득 존엄사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떠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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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3
어머니의 담요

 

어두운 하늘은 그대로인데 땅 위에선 엎치락뒤치락 종잡을 수 없는 날씨가 연이어 펼쳐지고 있었다. 물에 젖은 스펀지처럼 시커멓고 푸석한 구름들이 세치는 되게 싸락눈을 퍼붓더니 어느새 굵은 빗줄기가 되어 바람까지 몰고 왔다. 얼음비가 될세라 서둘러 돌아오는데 앞질러 탈바꿈한 가루눈이 차창을 가렸다. 길바닥은 질퍽거리고 그 사이를 달리는 차들은 진흙 범벅으로 지저분하다.  

사람들의 기분은 축축하고 음울하고, 한마디로 우중충하고 스산한 날씨다. 이런 날은 뜨끈한 온돌방 찜질이 제격인데 어깨를 움츠리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온돌방이라는 낱말이 소리로 울리자 내 마음은 먼 세월의 뒤안길을 서성거렸다.

 겨울철이면 군불로 길들여진 안방 아랫목엔 언제나 얇은 솜이불이 덮여 있었다. 어서 와. 이불을 들치고 손, 발을 담그면 언 몸이 스르르 녹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곤 하였다.

하루의 일과를 보고하느라 쉴 새 없이 재잘거리던 자매들, 이불 속에 묻어 둔 주발의 따끈한 밥과 구수한 두부된장찌게가 세상 제일의 꿀맛이던 저녁밥상이 온돌방의 훈훈한 열기처럼 아련하게 떠오른다. 심신의 어떤 추위도 순식간에 녹여내던 구들장 찜질을 그리는 눈앞에 슬며시 또 다른 영상이 비쳐졌다.

 73세에 홀로되신 시어머님은 몸만 오면 된다는 아들의 말대로 작은 여행가방 하나 들었다. 그게 전부인가 했더니 그보다 몇 배 더 큰 보퉁이 하나를 카트로 밀고 나오셨다. 작은 가방엔 사진첩과 몇 벌의 한복, 노리개 패물 등 간편했는데 보퉁이를 끌러보고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요 두 장과 솜이불, 납작한 베개, 세수수건 두 장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새것이 아니고 20, 30년은 족히 쓰던 오랜 물건들이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침대를 마다하고 부엌 옆에 달린 작은방 바닥에 담요 두 장을 접어 요로 깔고 수건으로 베개를 싸서 베고 이불을 덮고 주무시는 것이었다. 한국식으로 밤에는 이부자리를 펴고 아침이면 걷어서 한 모퉁이에 쌓아 놓는 잠자리 일과가 어이없었다. 새것으로 바꾸려 여러 번 시도했으나 그게 편안하다며 막무가내셨다. 손님이라도 오는 날이면 침구를 전부 다른 곳에 옮겨놨다가 떠나면 다시 펴 드리곤 하였다.

시어머님은 무남독녀이시고 나는 2대 독자인 무녀 독남과 결혼하여 시어머님의 친정어머니까지 시어른들만 세분인 시댁에서 3년간 살았다. 광복이 되자 남으로 내려가는 딸을 배웅하던 친정어머니는 차마 손자를 보내지 못하고 찻길까지만 업어다 준다며 주춤주춤 따라오다가 그만 남쪽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내내 딸 손자와 함께 살며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

개성 호수돈 여학교를 졸업하신 어머님은 움직이는 교과서라 불릴 만치 무척 총명하고 개성사람 특유의 검약심이 강하고 부지런하였다. 아침마다 여섯 식구가 벌집 쑤신 듯 소동을 부리고 떠난 집안을 깨끗이 정돈하고 텃밭을 가꾸고 화분에 물주며 돌보셨다.

한국비디오를 빌려다 보고 설교테이프를 듣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이웃과 인사도 나누면서 20년간 즐거운 삶을 사셨다. 가끔 일찍 돌아와 보면 쌓아놓은 이부자리에 기대어 아주 편안한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다. 무겁고 커서 빨지도 못하는 담요와 이불에 호청을 씌우느라 애를 먹던 일이 다시 떠오른다.

밖에는 제법 큰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 온돌방 따끈따끈한 아랫목이 한없이 그립다. 이불을 들치고 손발을 묻던 그 시절이 눈앞에 확대되는 순간 퍼뜩 깨달았다.

어머님은 고향을 들고 오신 거라고. 수륙만리 캐나다 땅에서 포근하게 감싸 줄 담요가 필요했던 거라고. 마음이 허하면 냉기가 더 크게 스며든다는 걸 그때는 왜 몰랐을까.

단 하나뿐인 아들 곁에 있어도 고향은 인간이 돌아가야 할 귀소본능의 보금자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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